시간은 여지없이 흘러 점점 가을이 깊어갑니다.
도로가에 서있는 은행나무의 푸른 잎은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르면 바람에 흔들린 은행잎은 푹신한 이불처럼 길 위에 깔리겠지요?
그러면 누군가는 상념에 젖을 것이고 누군가는 노란 이파리를 치우느라 땀을 흘릴지도 모릅니다.
가을은 이렇게 우리 곁으로 찾아와서 어느샌가 또 지나가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깊어가는 가을 향기를 음미할 여유조차도 없습니다.
우리는 깊은 상실에 빠져 분노하고 슬퍼하고 허탈해 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뭐라고? 이런 중차대한 시국에 한가하게 연극이라고?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맞아요. 지금 우리나라 꼴은 개판이에요!
사람들 사이에 은밀하게 떠돌던 소문은 실체적 진실로 하나둘 밝혀지고 있습니다.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자 사람들은 경악했고 소문 너머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은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 사용되었고
그나마 허공에 맴돌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는 말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다시 광장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민주공화국을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 몫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삶을 살아내기가 버거운 시절을 겨우겨우 살아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과 오직 승자만이 독식하는 싸움의 우리 안에서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돈은 모든 걸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이 되어 사람들을 옥죄고 있습니다.
그 사이 민주공화국은 권력자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에 의해 괴멸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각자도생의 벌판으로 내몰렸습니다.
이런 일이 비단 우리에게만 일어난 건 아닙니다.
이미 50여 년 전 이탈리아 밀라노의 어느 마을에서도 벌어졌습니다.
어느날 밀라노 사람들은 슈퍼마켓을 습격하고 국가기간산업을 마비시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도덕과 규범, 법 따위를 지키며 단지 열심히 살아왔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치솟는 물가와 해고의 소용돌이에 내몰렸습니다.
그 안에서 여자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슈퍼마켓에서 훔친 물건을 품안에 감춰서 얼토당토않은 임신 소동을 벌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웃지 못할 처연한 슬픔의 몸짓에 다름 아닙니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결국 저항했고 서서히 국가니 정당이니 하는 정치의 실체를 깨달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렇게 당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놈들은 제 할 일 다하고 실속은 다 차린 거야!" 하는
밀라노 사람 죠반니의 외침은 그곳, 그때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도대체 우린 모두 어디서 뭘 하는 거냐구!" 라는 자성의 목소리는 시공간을 넘어서 오늘 우리의 귓가를 때립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살다가 황망하고 어이없는 꼴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분노하고 슬퍼하며 광장으로 달려갑니다.
이러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연극 한 편에 다 담을 수는 없겠지만
충차대한 시국에 민주공화국을 향한 우리의 작은 염원을 다잡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밀라노의 평범한 소시민 죠반니의 외침은 그래서 현재진행형입니다.
"이젠 정말 더 못 참겠어! 어디 들어와서 멋대로 해보라고 그래! 나도 가만 안 있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