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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하나

몽하리사람들 백제를 만나다 그믐밤 자시(子時)에 별이 총총했다. 상관은 다급하게 석부리를 찾았다. 석부리가 상관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때까지 한식경이 온밤이라도 되는 양 더디게 갔다. 상관은, 여전히 잠결인지 조막손으로 눈두덩을 비비며 휘적거리는 석부리를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다그쳤다. 왕께서 침소에 아니 계신다. 그런디요? 석부리가 하품을 하며 상관을 빤히 쳐다봤다. 네 이놈. 갑자기 높아진 목청에 스스로 놀란 상관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석부리의 귓불을 틀어쥐고 추켜올리며 주위를 살핀 뒤 귀에 대고 나지막이 엄포를 놨다. 이놈아, 정녕 니가 명을 다하고 싶지 않은 것이냐? 숨도 쉬지 말고 이 길로 별궁으로 가서 왕의 그림자를 찾아라. 아아, 아파요. 석부리가 버둥거렸다. 이놈이 그래도. 상관이 손에 힘을 줘 다시 한번 틀어쥐고.. 더보기
봄이 온다 아직 일렀나 보다. 동백나무가 뒤덮고 있는 섬에 붉디붉은 동백꽃은 피지 않았고 그러니만큼 툭, 떨어져서 꽃 천지를 이루지도 않았지만, 꽃이 피기를 기다린다는 듯이 늘어선 사람들은 저마다 동백나무 앞에 서서 스마트폰을 높이 들었다. 동백꽃 이파리는 아직 펴지지 않았고 꽃망울만 제각각 매달려 있었다. 연둣빛 동백나무 이파리만 마지막일지도 모를 겨울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먼바다에서 불어오는 살짝 봄을 묻힌 바람에 스스럼없이 살랑거렸다. 오늘은 강진 쪽으로 갈까? 일요일 아침 일찍 동네를 한 바퀴 달리고 현관문을 열면서 말했다. 지난주에 우리가 너무 빨리 갔을까? 아니면 올해는 좀 늦나? 어젯밤에 늦게까지 영화를 보면서 봄맞이 동백꽃 구경을 하러 가자고 이야기했다. 몇 해 전 구빈이랑 다 같이 가고 나서 둘.. 더보기
기온(紙園)역에서 너를 만나다 옆길로 빠질 뻔하다가 아슬아슬하게 고가도로에 올랐다. 산중턱을 가로지르는 유료도로를 지나고 터널을 빠져나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속도로가 나타났다. 네비게이션이 안내를 해줘도 갈림길에서 살짝살짝 어긋나는 바람에 조바심이 올라오더니 마침내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왔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하자 교통량이 현저하게 줄었다.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버튼을 누른 뒤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고 앞쪽을 멀리 바라보며 한숨을 돌렸다. 부산에 왔다가 집에 갔다가 다시 부산까지, 이 길을 이따가 또 와야 한다니 내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어이없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왕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얼른 다른 방법을 찾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길 수밖에. 그래, 잘한 결정이야. 둘만 보낼 수는 없잖아... 더보기
두 남자가 꾸는 꿈 사람들이 모여서 무시로 소식을 전하는 SNS모임에 연설을 한다는 소식이 올라왔을 때 누군가는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하네,라고 운을 뗀 뒤 그 별짓에 함께합니다,라고 했고 두 남자를 보기 위해 멀리서 일부러 왔습니다. 작년 말에 처음 말이 나왔을 때 사람들 중 몇은 그게 가능해,라거나 나이 먹고 우리말 외우기도 힘든데, 따위의 말로 다소 회의적이기도 했지만, 재밌을 거 같은데,라거나 그러면서 한판 노는 거지 뭐,라며 기대하는 축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겨울을 건넌 시간은 해를 지나 이듬해 3월에 도착했고, 리허설까지 마친 연설회장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겨울을 지나면서 닳고 헤지고 찢어진 연설 원고는 마지막 시간을 위해 다소곳이 테이블 위에 놓였습니다. 연설을 하기로 했던 3월 1일, 삼일절에 시간은.. 더보기
저기 마지막이 온다 마지막은 왔다. 시작할 때 마지막이 올 거라고, 우리는 생각했을까? 처음이 있었으니 마지막이 오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그 마지막이 어떤 마지막일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른 마지막을 품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때 우리에게 마지막은 처음에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중간이 될 수도 있고, 막바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야말로 마지막에 마지막이 올 수도 있을 거라고, 나는 또한 생각했다. 마침내 그럴싸한 결말을 그리듯이 혹은 누군가 했던 말처럼 다행스럽게도 마지막에, 마지막이 왔다. 나는 마지막이 오면 어떤 마음이 들지 우리 한번 봐볼까, 하는 말을 이번 연극을 함께한 사람 몇 명에게 때때로 하고는 했는데, 누군가 마지막이 올까, 오겠죠? 하는 바람에 마지막이 조금 낯설었다. 그렇지만 막.. 더보기
캠핑의 추억 자동차 트렁크는 이미 빽빽했다. 가로, 세로로 레고 블록을 맞추듯 짐을 이리저리 끼워넣는다. 빈틈이라곤 좀체 찾아볼 수 없다. 뒷좌석에도 채운다. 운전석 룸미러에 뒤에 따라오는 차가 보이지 않는다. 온통 짐으로 가득 찼다. 피난민도, 피난민도 이런 피난민이 있을까 싶을 만큼, 이것은 차라리 난리 통에 짐을 싸서 떠나는 피난민이다. 난리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본격적으로 피난 행렬이 시작된다. 이런 피난 행렬에 끼었던 날이 언제였을까? 아마도 10여 년 전쯤 된 것 같다. 구빈이가 3학년인가, 4학년 때 일이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때 우리 학년은 의기투합했다. 거의 모든 가족이 텐트, 타프, 의자, 테이블 등등 캠핑용품을 샀고, 몇 번 캠핑을 다녔다. 캠핑용품점에서 와, 이런 것도 .. 더보기
이상한 이발소 얼른 옷 벗고 오시라고요. 예, 갑니다. 에어컨 바람 아래 큰 대자로 드러누워 유튜브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호출 소리를 몇 차례나 듣고서야 움직였다. 숨이 턱 막히는 무더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에어컨 바람 아래 쓰러지기 일쑤였다. 올여름은 폭염과 열대야로 역대급 최고 기온이라든가 며칠째 이어지는 열대야가 역대 몇 번째라든가 하는 뉴스가 계속됐다. 온열질환자와 사망자가 지난 몇 년도에 비해 몇 퍼센트 증가했으며 이는 역대 몇 위에 해당하며,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최고 기온을 갈아치웠다는 기사가 매일 이어졌다. 날이 이런 지경이니 에어컨은 이제 필수품이 됐고, 퇴근하고 미동도 없이 쭉 뻗은 모습은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몸짓이었다. 기후 변화와 이상 기후가 전 지구적으.. 더보기
바닷가에서 자고, 산에 오르자 날이 좋아졌다. 이른 더위가 찾아온 게 맞겠지. 우리는 텐트에서 자도 춥지 않겠는데, 하는 생각을 했고, 곧바로 주말에 우리의 오막살이를 챙겼다. 올해 처음 캠핑은 율포해수욕장 솔밭이었다. 사람들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솔밭에 텐트가 가득해서 텐트 난민촌을 방불케 했다. 요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장박 알박기로 보이는 텐트도 많았다. 올해 첫 캠핑을 다녀오며 우리는, 한적한 데로 가는 게 어떨까, 했고 두번째 캠핑은 유명하지 않은 바닷가로 갔다. 율포해수욕장에서 멀지 않았지만 텐트는 몇 동 보이지 않았고, 우리는 여기가 좋겠네, 하며 우리의 오막살이를 펼쳤다. 부피를 줄이고, 짐을 줄여서 둘이서 한 번에 들고 다닐 수 있으니 한갓지게 펼치고 접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올망졸망한 캠핑 가재도구와 텐트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