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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몇 장

무위당 전시회 <여는 마당>

 

그날 아침, 배가 가라앉았습니다. 세월호라 이름 붙은 배가 검고 푸른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 배에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4월의 노란 섬, 제주도를 찾아가던 사람들이 그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 했습니다. 4월 16일 아침 세월호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가라앉는 배를 지켜보던 우리는 제 손으로 가슴을 쥐어 뜯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저마다의 가슴을 쥐어 뜯으며 가만히 앉아 있는 것,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배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바닷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오늘 하루를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슴을 쥐어뜯던 우리는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304명의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우리 안의 울림을 들었습니다. 그러한 울림을 따라서 2014년 9월 21일, 사람들 몇 명이 모였습니다. 사람들은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단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세월호에 대해서, 우리 사회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자신이 바로 세월호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갔습니다. 우리는 돌아오지 못한 304명의 삶을, 우리들 한 명 한 명이 그들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더불어 우리는 이렇게 소중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두 달이 지난 2014년 11월 26일 우리는 순천 문화의 거리에서 세월호 가르침으로 3년을 살아보자는 <삶을 위한 304인회>를 결성하였고, 우리 지역에 함께하기를 바라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월호 대참사 앞에 우리의 삶이 세월호였음을 깨달았습니다. 희생된 304명의 죽음이 헛된 죽음 되지 않기를 염원하였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문명의 대전환과 생명존중의 가치관으로 새롭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성찰과 각성으로 깨어나서 사람답게 제대로 살며, 함께 더불어 살기로 했습니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깨어나야 한다,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슬픔과 비탄에 잠기기 보다는 서로 독려하고 힘을 내서 새로운 삶을 3년 동안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최소한 3년은 정성을 들여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맞아, 이렇게 살아서는 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날 거야. 깨어나야 돼! 라고 했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데에 공감했지만 어떻게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우기로 했습니다.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명을 존중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 시대의 큰 스승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매월 한 번 만나서 공부 모임을 하고, 저마다 매일 4시 16분이 되면 자기 안의 소리를 듣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 날들이 지나 100일이 되면 둘러앉아 작은 촛불을 켜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1주기에 순천교육청에 모여서 침묵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또한 세월호 유가족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눈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마사키 다카시(正木高志) 선생님을 모시고 급격한 기후, 환경의 변화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우리 앞에 직면한 나의 삶이며 이를 위해서 지금 살고 있는 삶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아야 하며 탐욕의 시대를 넘어 겸손한 존재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숲의 목소리를 전해주는 노래를 나지막하게 불렀습니다.

 

우리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은 우주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의 소중함을 말하고, 생명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늘처럼 모시려 했던 사람,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던 사람, 정의로움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실천했던 사람, 사람의 따뜻함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위당 선생님의 21주기 추모제에 참석하여 지금과 다른 삶의 길을 찾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작품 전시회를 통해서 선생님의 삶과 정신을 배우기로 하고 작품전을 준비하였습니다. 우리는 매월 몇차례씩 모여서 나와 장일순, 우리 안의 장일순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전시회를 하는가 마는가의 문제보다는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들 한 명 한 명이 무위당의 삶과 정신을 따라서 살아보는 연습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작품 전시회는 자연스럽게 펼쳐질 것이라 여겼습니다. 우리는 무위당 선생님의 후학인 무위당학교 교장인 황도근 교수님, 원주사람 김용우 선생님, 서예가인 심상덕 선생님을 모시고 선생님의 말씀을 전해들었습니다. 사랑어린학교의 아이들은 선생님의 글씨와 그림을 따라서 써보며 선생님의 말씀을 새겼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에 대해서 공부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정성을 들여서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또한 우리는 무위당 선생님의 삶과 정신을 따라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1만 원을 내서 마음을 모으는 만원계(契)를 통해서 순천장일순사람들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지난 1년 동안의 준비와 공부 모임을 하고 전시회가 펼쳐졌습니다. 우리는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이 없었던 무위당 선생님의 삶과 정신을 우리 안에 펼쳐놓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전시회가 아무도 모르게 피었다 지는 저 들꽃처럼 살아가는 데 첫 발을 내딛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2016년 1월 13일 순천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무위당 장일순의 삶과 정신, <아무도 모르게 피었다 지는 저 들꽃처럼> 무위당 선생님의 글씨와 그림, 후학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전시회는 1월 13일 여는 마당을 시작으로 1월 20일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16일에는 도법스님을 모시고, 18일에는 관옥 이현주 목사님을 모시고, 19일에는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님을 모시고 장일순 선생님의 삶과 정신, 우리 시대의 장일순에 대한 이야기 마당이 펼쳐졌습니다. 전시회 기간 동안 전시회장은 순천 지역의 동아리나 단체의 모임의 장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순천 한살림, 사랑어린학교 학부모, 관옥나무도서관 등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위당의 작품을 보고 자신들의 삶 속에서 무위당을 찾고 따르려는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전시회의 시작을 알리는 여는 마당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작은 촛불을 켜고, 꽃을 띄운 따뜻한 차를 준비했습니다. 어두운 밤길을 걷는 나그네가 한 줄기 불빛을 찾아오듯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의 글씨와 그림은 작은 오두막의 불빛을 찾아온 사람의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따뜻한 차 한잔처럼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습니다. 차를 준비한 사람들은 찻물이 식지 않도록 쉼없이 물을 데웠습니다. 사람들은 따스한 찻잔을 두 손으로 꼭 쥐었습니다.

 

 

 

 

 

 

 

 

 

 

 

 

 

 

 

 

 

 

 

 

 

 

 

 

 

 

 

 

 

 

 

 

 

 

 

 

 

 

 

 

 

 

 

 

 

 

 

 

 

 

 

 

 

 

 

 

 

 

 

 

 

 

 

 

 

 

 

 

 

 

여는 마당이 시작 되기 전에 사람들은 전시회장을 둘러보고 서툰 글씨로 혹은 일필휘지로 자신의 마음을 담은 글을 남겼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께서 "함께하는 우리들 서로 보듬고 가자"라고 방명록에 썼습니다. 사람들은 작품을 보고 서로 이야기 나누고 안내장을 꼼꼼히 읽으시거나 휴대전화를 들고 작품을 담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앉자 전시회장 불이 꺼졌습니다. 어둠 속에 작은 촛불 몇 개만이 불을 밝히고 슬라이드 영상으로 무위당 선생님의 생애를 담은 그림책 동화 <조 한 알 할아버지>의 책장이 넘어갔습니다. 어젯밤 잠들기 전 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주던 엄마는 오늘 전시회장에서 사람들에게 동화를 읽어 주었습니다. 아이 엄마는 여는 마당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마이크와 메모지를 손에 꼭쥐고 몇 번이나 동화를 읽었습니다. "커다란 측백나무 울타리가 서 있는 할아버지네 마당은 꽃들이 참 많아요. 나리꽃도 피었고요, 작은 풀꽃도 있어요. 할아버지 집에는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시인도 오고 정치가도 오고 구두닦이 소년도 왔어요."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 소리가 어두운 전시장 안에 낮게 드리웠습니다.

 

 

 

 

 

 

 

 

 

 

 

 

 

 

 

 

 

 

 

 

 

 

 

 

 

 

여는 마당을 이끌어 주는 박소정 선생님께서 또다른 할아버지를 소개해주셨습니다. 강원도 원주에서 공부하고 성찰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무위당사람들의 김영주 고문은 무위당 선생님의 제자이며 무위당을 말씀해주시는 살아있는 증인이기도 합니다. 할아버지는 여든이 넘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무위당의 전 생애를 아주 신명나게,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자신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분도 있어서 그 분의 삶, 그 분의 정신에 누가 될까  걱정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장일순 선생님이 대학교를 다니다 6.25 전쟁이 나서 군대에 다녀온 뒤 고향인 원주로 돌아와 학교를 다시 가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아버지, 서울에서 공부할 돈이면 아이들 70명이 공부를 할 수 있어요."하면서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고등공민학교에 취직한 일, 맞선을 본 날 스스럼없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 일, 북진통일에 반대하여 516군사정권에 의해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감옥에서 공부를 하던 일, 사모님이 옥바라지를 했던 일, 반공법위반과 용공분자라는 낙인으로 늘 정권으로부터 감시 당하고 가족들이 취직을 할 수 없었던 일, 포도농사를 지으면서 농약과 화학비료의 피해를 제일 먼저 입는 것이 농부라는 것을 체험하고 농업이 모든 생명의 기본이라는 각성을 한 일, 지학순 주교를 만나 민주화와 종교의 개혁에 관한 일, 농부 스스로 공부하고 깨우쳐 시작하게 된 한살림운동 등에 대한 일화를 들려 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밤을 새우며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지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분에 대해 말씀하실 때 생생하게 그 분과 만나고 계셨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사람들 중에 몇이 살짝 엉덩이를 들썩였습니다. 여는 마당을 진행하는 사람이 할아버지에게 메모지로 마무리해주실 것을 요청했지만 할아버지는 이런 일조차 즐거워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마치 어린아이가 자랑을 하는 것처럼 천진난만하고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김영주 고문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 그 옛날 겨울밤에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듣던 이야기처럼 전시회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구수하게 울려퍼졌습니다.  

 

 

 

 

 

 

 

 

 

 

 

 

 

 

 

 

 

이번 전시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분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이런 분들이 무위당 선생님의 작품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오랫동안 응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짝 생각했습니다. 조충훈 순천시장은, 순천은 국가정원 제1호가 있는 도시이고, 산업화시대 이후 생태와 자연이라고 하는 삶의 질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무위당의 일생을 통한 삶과 정신이 우리 순천시민이 원하고 바라는 삶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전시회가 우리 순천시민에게 정신적인 위안이 되어준 데에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 번 이 귀한 자리 만들어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리며 시민들과 함께 무위당 선생의 진정한 삶과 정신 그리고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우리 시민들에게 많이 퍼지고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은 교육의 중요함으로 교사로, 교장으로, 학교의 이사장으로 일하기도 하셨습니다. 전시회장을 찾은 장만채 교육감은, 들꽃은 자기 역할을 다 할 뿐인데 단지 우리가 예쁘냐, 유용하냐를 구별할 따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위당의 생애를 보여준 동화에서도 나왔지만 구두닦이든 청소부든 누구든지 그 존재 의미를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들꽃을 구별하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가 의미가 있고 없고, 쓸모가 있고 없고를 구별 짓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출세하고 많은 것을 가진 것을 의미있다고 생각하는데, 모두가 존재의 의의가 있고 모두가 아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고 행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전남교육청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있는 학생일지라도 그 학생은 존재의 의미가 있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 또 그 학생들이 잘 돼서 많은 향기를 주변에 퍼뜨릴 수 있게 하는 교육을 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우리 아이들이 정말 그 본인들이 갖고 있는 본연의 향기를 내뿜을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는 마당을 이끄는 박소정 선생님이, 우리가 무위당의 삶을 따라가지는 못 하지만 이 암울한 시대에 우리가 서로 손잡고 따뜻한 삶을 살아보고자 해서 순천무위당사람들을, 세월호에 의해 희생당한 304인이 살지 못한 그들의 몫까지 저희가 더불어서 살아보고자 하는데요라고 말하며, 이런 순천무위당사람들에 시장님과 교육감님도 이름을 올려주십사 하고 물었고, 두 분께서 흔쾌히 함께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그리고 꽹과리, 징, 장구, 북, 태평소와 춤사위가 어우러졌습니다. 순천무위당사람들 여섯 명이 문둥북춤, 고성오광대 중 한 마당을 펼쳤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아픈 몸과 마음, 이 땅의 아픔을 치유하는 어울림이었습니다. 우리 자신과 이 땅의 사람들, 이 땅을 위해서 치유와 사랑의 빛을 몸짓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사회자가 치유와 사랑과 생명의 빛을 표현하는 신명의 몸짓이라고 말할 때 사람들 중 몇이 눈물을 훌쩍거렸습니다. 춤을 추는 사람이 탈을 썼지만 그가 지금 그러한 과정을 아픈 몸으로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평소가 길게 전시장 안을 휘감아 돌면서 잦아들 때 한보리 선생님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의 말씀에 곡을 붙여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한보리 선생님은 노래이기 전에 무위당의 말씀이라고 여긴다고 했습니다. 기타와 한보리 선생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무위당 선생님의 글씨와 그림 사이로 떠돌았습니다. 사람들은 가만히 들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 작품을 보내주신 박종석 화백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춤사위와 노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보리님의 노래를 듣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멀리 원주에서 온 원주무위당사람들의 김영주 고문님, 정인재 이사장님, 강릉에서 온 전 강릉 한살림 이사장 이혜원님, 순천 전시회를 위해 애쓴 무위당사람들의 사무총장 이상훈님, 무위당학교 교장 황도근님, 원주사람 김용우님 등 원주에서 30여 명이 찾아오셨고 인사했습니다. 호남에서 무위당 정신으로 살려고 하는 분들인 광주무등공부방의 강정채 전 전남대 총장과 김용호 박사님이 인사했습니다. 순천에서는 순천교육지원청 신경수 교육장님과 전YMCA 이사장 김문식님, 우리 시대의 진정한 농부인 한원식님이 인사를 했습니다. 순천에서 종교 간의 벽을 허물고 화합을 노래하는 4대 종단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순천 다연사 온곡스님, 원불교 홍현두 교무님, 카돌릭 가브리엘 신부님, 개신교의 전진택 조은호 김민해 목사님이 함께 손을 잡았습니다. 

 

원주의 무위당사람들 정인재 이사장님이 무위당 선생님에 대한 말씀과 순천전시회에 전하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은 말씀과 삶을 일치하는 삶이었고 늘 하늘을 모시는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작품을 써주실 때에는 그분한테 삶의 양식이 되는 말씀과 화제를 담아서 써주셨습니다. 때로는 경책이 되고, 때로는 거울이 되고, 때로는 밥이 되는 그런 글귀들을 써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하신 일이 많다고 하는데, 선생님이 직접 드러내고 무엇을 하신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 뒤에서 조용히 당신이 해야 할 바를 함으로써 앞에 나선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순천은 무위당 선생님하고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는데, 이렇게 전시회가 열리게 된 것은 순천에 계신 분들의 큰 덕과 시대를 읽는 아량이 있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또한 15일부터 생명평화 희망 워크샵이 순천 사랑어린배움터에서 열리는데 생명운동이 시작된 지 30여 년만에 열리는 큰 자리인 것 같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시끄러운데 생명운동이 시대에 부응하는 결실을 맺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순천이 생명평화운동과 공동체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순천과 원주의 마음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길 바랍니다."

 

 

 

 

 

 

 

 

 

일부님이 순천 무위당사람들을 대신해 멀리서 찾아온 선생님과 도반을 맞이하는 인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순천에서도 무위당 선생님의 작품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날이 왔습니다. 이걸 시작한 마음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새로운 세상에 살고 싶어서 시작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두 가지 선물을 받았는데 하나는 이겁니다. 선생님, 저희가 새로운 세상에 살고 싶어서, 저기 있는 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서 시작했습니다. 했더니 선생님께서, 새로운 세상은 오는 게 아니야! 니가 서있는 자리가 새로운 세상이야! 이러시더라고요. , 선생님 그렇군요! 맞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어느 곳에 있다거나, 어디에서 오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내가 선 이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렇군요. 또 하나 배웠습니다. 잘 배웠죠? 제가 생각해도 대견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어요. , 어떻게 이름을 이렇게 지을 수가 있을까요? 순천무위당, 순천과 무위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사는 순천이 제발 순천스러웠으면 좋겠어요. 순천이 한국사회의 이렇게 답답한 것에 햇살이 되는 그런 순천, 그리고 순천에 사는 사람들이 순천한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가 받은 두 가지 선물 중 하나는 새로운 세상은 지금 여기다.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이다. 그리고 저도 순천무위당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라고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눈을 떠라라고 하셨어요. 이 전시회를 통해서 눈을 뜨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이번 전시회가 여는 전시회와 다른 것은 보고 있으면 눈이 떠지고, 가슴이 열리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이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역사와 은총이 있기를 바라며, 여러분들도 동행해주시고 성원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마운 말씀 드립니다."

 

 

 

 

 

 

 

강진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손학규 전 상임고문이 오셨습니다. 197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며 도피생활을 하던 때 무위당 선생님과의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벌써 40년이 됐네요. 원주에서 도망생활을 할 때 무위당 선생님께서 보호 해주시고, 김영주 선생님 원주의 많은 선배님들이 저를 보호 해주고 숨겨주었습니다. 단지, 그런 것만이 아니라 제가 원주생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요, 그때는 정치라기보다 우리 사회가 뭔지를 느끼게 해주었어요. 그때가 벌써 40년 전이 됐고, 선생님 돌아가신지 25년이 됐어요. 제가 정치에 입문하고 얼마 안 돼서 돌아가셨어요. 그전에도 쭉 사랑을 느끼게 해주셨어요. 저기에도 사진이 있지만 인자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게 너무 흔한 표현이라는 게 그렇긴 한데, 풋풋하게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고는 했습니다. 이분이 사상적으로 삶을 직접 느끼게 해주었는데 참 훈훈하고 푸근하고... 그래서 무위당 선생님, 무위당 선생님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제가 국회에 있을 때 협동조합기본법을 만드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원주에서 살았던 일, 원주신협, 한살림 등을 통해서 협동조합정신을 느끼고 배웠던 것이 국회에 있을 때 협동조합기본법을 만드는 데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어른들이 전시회장 안에서 무위당 선생님을 추억하고 있을 때 아이들은 전시회장 이곳 저곳에서 친구들과의 추억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사랑어린배움터를 졸업했던 친구들이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다시 만났습니다. 졸업한 몇몇 친구들은 순천 친구 집에서 먹고 자며 전시회 일을 돕고 있습니다. 초등 친구들은 긴 겨울방학 중에 오랜만에 만나서 놀기에 바쁘기만 합니다. 남자 친구들은 남자들끼리, 여자 친구들은 여자들끼리 어울려 뭔가에 열심입니다. 꺄르르 웃다가 뒤로 나자빠집니다. 별일 아닌 것 같은데도 아이들은 즐겁습니다. 잠시 후에 있을 리코더 공연에 대한 부담이나 걱정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서로 화음을 맞춰 멋진 리코더 합주를 들려주었습니다. 

 

 

 

 

 

 

 

 

 

서예가인 심상덕 선생님은 순천전시회를 위해서 사전에 오셔서 작품의 배치와 작품마다에 얽힌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심상덕 선생님께서 순천전시회에 대한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제가 전시회를 위해서 이틀 전에 와서 준비과정을 보니까 여러분들이 너무 많이 고생하시고 준비도 철저히 하셨다는 걸 느꼈어요. 특히 304인의 정성을 모아서 했다는 데에, 순천전시회가 14번째인데 이번 전시회는 독특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성이 모였다는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무위당만인회나 무위당사람들에게 순천 304인의 정성을 잘 담아서 가져가겠습니다. 특히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은 저기 밖 복도에 보면 습작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이미 무위당 선생님의 영적인 공부를 너무 많이 한 것 같고, 어린 무위당의 삶을 키워내게 해주신 교사들과 학부모들에게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저희 동네에서도 못 한 걸 해주셨다는 것에 대해 뼈저리게 느끼고 갑니다. 또 한 가지는 며칠 전에 순천에 들어오는데 입구에 큰 플랭카드가 걸린 것을 보고 이미 무위당 선생님이 순천지역에 이미 왕림을 하셨구나 생각했어요. 또한 저희를 푸근하게 대해주시, 제목도 너무 잘 지어서 선생님 말씀이 함축적으로 잘 들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상덕 선생님은 전시회 기간동안 매일 오후 2시에 관람객들에게 작품 한 점 한 점에 대한 설명을 꼼꼼하게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날에는 두 차례, 세 차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무위당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습니다.

 

 

 

 

 

 

 

 

 

 

 

 

 

 

 

 

 

 

 

 

 

 

 

 

 

 

 

 

 

 

 

 

 

 

 

 

 

 

 

 

 

 

 

 

 

무위당 선생님과의 추억을 나누고 선생님을 기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사람들이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무위당 선생님의 말씀이 담긴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나는 미처 몰랐네. 그리고 순천 전시회의 의미와 정신을 촛불에 담아서 우리 마음 속에 오롯이 담았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의 후학들이 그 촛불을 밝히고 함께 촛불을 껐습니다. 시루떡 위에서 촛불이 타고 꺼질 때 사람들은 다시 노래했습니다. 한 송이 꽃 속에 천지가 있다고, 한 송이 꽃 속에 우주가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사랑어린 아이들과 어른들이 각각의 리코더를 들고 합주를 했습니다. 높고 낮은 자연의 소리가 서로 어울리며 전시장 안을 돌아서 사람들의 가슴에 가닿았습니다. 사람들은 가만히 눈을 감고 듣거나 리코더 연주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또 누군가는 휴대전화로 그 모습을 간직했습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마지막 음을 길게 불고난 뒤 입에서 리코더를 뗐을 때 무위당 선생님의 순천전시회의 여는 마당이 끝났습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서로를 격려했고, 무위당 선생님 아래에 함께하고 있음에 감동했습니다. 여는 마당이 끝나고 사람들은 전시된 작품을 둘러보거나 전시회장 안과 밖에서 반가움과 아쉬움을 담은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멀리 강원도 원주에서 오신 선생님과 도반을 사랑어린배움터로 모셨습니다. 멀리서 친구가 찾아왔으니 어찌 그냥 보낼 수가 있을까요? 따뜻한 밥을 짓고 나물을 무치고 국을 끓여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막걸리 한 잔에 흥을 담았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의 향기를 닮고 싶은 젊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습니다. 어르신들이 함께 박수를 치며 어깨를 들썩였습니다. 사람들은 무위당 선생님에 대해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자기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농부이신 한원식 선생님께서 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동요를 불렀습니다. 빗물아 모여모여 어디로 가니 동무들을 만나려고 냇가로 간다. 사람들이 박수치며 함께 따라 불렀습니다.

 

"오늘날 종교가 기복증에 빠져 있는데 기도 때문에 그래요. 종교가 참삶을 살기 위한 다짐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기도를 하면 이루어지는 걸로 착각을 하고 살고 있어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나 생각해봤더니 밥을 받들지 못해서 그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밥을 받드는 것은 무엇이냐? 밥을 저버리지 말아야 되는데 오늘날 우리의 밥상머리는 밥을 저버리고 있어요. 그것이 무엇인가 하니 흰 쌀밥 있잖아요? 흰 쌀밥을 먹는 것은 밥을 저버리는 행위예요. 오늘 저녁 우리가 먹는 이 현미쌀이 밥을 저버리지 않는 거예요. 물질은 정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 몸의 흐름을 보면 먹은 것이 장을 거쳐서 피가 되고 세포가 되고 뇌세포가 만들어져요. 그러니 온전한 밥을 먹었을 때 온전한 뇌세포가 만들어지고 저버린 밥을 먹을 때는 저버리는 뇌세포가 만들어 지는 거예요. 저는 여기 사랑어린학교에 와서 밥을 중심에 두는 말씀을 드려요. 어린 아이들이 변화가 일어나려면 정신도 중요하지만 밥의 변화가 먼저 일어난 뒤에 정신과 밥이 같이 만나져야 정신의 변화가 오지 정신의 변화 하나만 갖고는 어려워요. 음양의 조화로 아기가 태어나듯이 정신과 밥이 따로 놀면 영원히 변화는 오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어요."

 

 

 

 

 

 

 

 

 

 

 

 

 

 

 

 

일부님께서 눈시울을 붉히며 스승님이 그리운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은 제 선생님의 선생님입니다. 어느날 같이 길을 가는데 뭔가를 꺼내서 주시는 거예요. 이거예요. 보이십니까? 무위당 선생님의 사진입니다. 이걸 만들어서 지니고 다니신 거예요. 저에게 건네 주시고는 눈물을 글썽이셨어요. 저는 누군가가 어느 한 사람을 이야기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걸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보질 못 했었는데 선생님으로부터 몇 번 그런 모습을 봤어요. 최근에 이걸 제게 주시는 거예요. 여기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좋아, 괜찮아. 지금 자네 잘 하고 있네. 아마 선생님께서 무위당 선생님으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씀이신 거 같아요. 이걸 제 손에 꼭쥐어주셨어요. 그러고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런 세월의 인연이 오늘 이런 자리를 만드는 데에 불씨가 되고 씨앗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무위당 선생님을 잘 모르지만 그분을 뵈면서 칠순이 넘은 양반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게 이거 구나! 당신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셨을까 그리고 이걸 또 누군가에게 건네주실 생각을 하셨을까? 이제는 제가 호주머니에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같은 스승을 모시는 사람들이 그분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함께 박수를 치고 어깨를 들썩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노래했습니다.술잔은 바닥을 보이고 그리움은 쌓여만 갑니다. 밤공기는 차가워지고 바람은 앵무산에서 와온바다를 향해 불었습니다. 점차 밤은 깊어지고 공양간의 불빛은 꺼질 줄을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