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마신 술로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울렁거렸다. 골목길을 돌아서자마자 쪼그려 앉아 밤새 마신 술과 안주를 쏟아냈다. 누군지 모르지만 등을 두드렸다. 술김에도 나는 너무 세게 두드린다며 그에게 타박을 했다. 토사물이 튈까봐 친구놈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등을 두드려줘도 뭐라 하네,라거나 얼마나 마셨다고 죽는 시늉을 하냐,라며 투덜댔다. 뱃속에 담긴 모든 걸 끄집어내자 눈물, 콧물이 찔끔거렸고 옷자락으로 침인지 위액인지를 훔치고 마른 세수로 그것들을 씻어냈다. 어기적 어기적 몇 발자국을 옮긴 뒤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갔다. 이불 위로 쓰러졌을 때 커튼도 없는 창문으로 네온불빛이 번쩍이며 들어왔고,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으로 방안은 환해졌다가 곧 어두워졌다. 여전히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울렁거렸다. 감긴 눈꺼풀 위으로 불빛이 내려앉았다가 사라졌다. 네온불이 켜지고 꺼지는 그 사이, 그 어슴프레한 새벽녁 같은 길을 따라서 나는 잠이 들었다.
잠이 든지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인 것 같기도 하고 얼마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가슴은 답답하고 목을 졸린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깊고 무거운 잠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 더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친구놈의 저팔계 다리가 가슴을 누르고 있었고 우리 세 명은 제각각의 잠버릇으로 널부러져 있었다. 여전히 네온불은 번쩍였고 그것을 의지해서 자리끼를 벌컥벌컥 마셨다. 노란 주전자와 엽차잔이 놓인 쟁반은 좁은 방안에서 누구 발에도 걸리지 않고 용케 놓여 있었다. 다디단 물을 들이켜고 번쩍이는 불빛 아래 잠든 친구놈들을 보며 친구와 함께 불법을 배우러 길을 나섰다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뒤 유학을 포기하고 되돌아온 옛날 옛적 신라의 고승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밤 무슨 얘길하며 술을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저 놈들과의 거친 언쟁은 어디서 시작되었나,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툭툭 몇 대 치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고승께서 뭐라고 했다더라, 세상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였던가. 골목길에서 누군가 싸우는 모양이다. 여자의 악다구니와 중늙은이쯤 될 것 같은 남자의 욕설이 들려왔다. 또다른 남자가 말리는지 끼어든다. 씨팔, 니가 뭔디 그래! 얇은 벽으로 옆 방의 거친 숨소리도 들려온다. 곧 숨이 넘어갈 것만 같다. 누가 저 여자를 숨 넘어가게 하나. 누군가 소리쳤다. 우라질, 잠 좀 잡시다! 새벽길을 달리는 자동차 불빛으로 방안이 환해졌다가 곧 어두워졌다. 경적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지면서 불빛을 따라서 들어왔다. 다시 잠이 들었다.
스물 살의 우리는 곱창골목이나 순대골목에서 소주병을 세가면서 술을 마셨다. 우리는 첫사랑의 환희와 그것의 상실에 대해 떠들었다. 우리는 그때 대학마다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던 우리 또래의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에 대해서 떠벌렸다. 밤새 단지 떠벌리기만 했던 우리는, 그것마저도 지칠 때쯤에 우리 중 누구의 자취방으로 가거나 시외버스터미널 맞은 편 골목에 있던 2층 터미널 여인숙으로 향했다. 계단 밑 안내실에서 5천 원을 내고 방을 배정받아 올라갔다. 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누렇게 뜬 벽지와 퉁퉁거리던 얇은 벽, 눅눅한 이부자리와 동그란 쟁반에 물주전자와 컵 하나, 구석에 놓인 빨간 텔레비젼이 놓여 있었다. 그 방에서 커튼도 없던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맞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두어 해가 지난 뒤 나는 여인숙에서 달방을 얻어서 장기투숙을 했다. 달방은 보증금이 없는 월세였다. 하루 방값을 한 달 치로 계산한 것보다 싸게 지낼 수 있었다. 학교는 휴학도 하지 않고 그냥 안 나갔다. 시내에 건물을 짓고 있는 공사현장이 있으면 일면식도 없이 찾아가서 인부 한 명을 붙잡고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 반장이나 사장 같은 사람을 불러줬다. 대학생들은 한 이틀 나오다가 그만 두니 안 받는다는 말에 저는 달라요, 했지만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현장이 완공될 때까지 일을 했고 사장은 보일러 놓는 자격증을 따서 자기랑 같이 일을 하자고 했으니 최소한 내 말에 책임은 진 셈이었다. 그때 시장 옆에 있던 은하여인숙에서 달방을 얻어서 지냈다. 새벽에 일을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왔다. 비가 오거나 대마찌가 나면 내 방 앞 툇마루에 앉아서 떨어지는 비를 보거나 옆 방 사람들과 막걸리를 마셨다.
은하여인숙은 대문 옆 문간방을 개조해서 구멍가게를 겸하고 있었다. 주인 할머니는 나이는 많았지만 부지런했다. 여인숙 마당과 툇마루를 쓸고 닦았고 구멍가게의 라면, 과자 같은 것들은 늘 가지런했다. 할머니는 여인숙 장기투숙객들에게 외상을 주기도 하고 방값이 밀려도 재촉하지 않았고 다만, 젊을 때,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돼! 흥청망청하지 말고.라고만 말했다. 할머니는 손자와 같이 살았다. 할머니는 아들 내외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고, 여인숙 사람들 누구도 주인집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손자의 덩치는 고등학교 1, 2학년 쯤 돼 보였는데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다. 그 아이의 말은 느리고 행동은 어눌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에서 성장을 멈춘 뒤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장 골목 아이들이 바보라고 놀렸지만 늘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더 놀리거나 그에게 무언가를 던지기도 했다. 하루는 이마가 찢어져서 들어왔고 할머니와 옆 방 누님이 약을 발라줬다. 그날 밤늦게 부슬부슬 비가 내렸고 할머니는 낮고 조용하게 흐느껴 울었다. 할머니는 때때로 한숨을 쉬듯이 저 놈을 두고 나가 어찌 저승사자를 따라 갈 꺼나, 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정민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정민은 교사인데 학생과 잘못 찍힌 사진이 SNS에 돌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민은 동성애자로, 미성년 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낙인이 찍혔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실망한 정민은 차라리 침묵한다.
세상 사람들 누가 그렇지 않을까만은 은하여인숙에서 달방을 얻어 사는 사람들도 제각각의 아픔과 상처를 안고 살고 있었다는 걸 이젠 알겠다. 한때 잘나가던 룸쌀롱 마담이었던 옆 방 누님은 그쪽 계통에서 퇴물이 되어서도 시장 술집 골목을 떠나지 못했다. 룸쌀롱 마담을 사랑했던 청년은 그만큼 사랑했던 마담을 뒤로 한 채 자신의 길을 갔고, 마담은 신파조의 사랑 영화에서와 같이 술을 마시고 울었다. 그 후 누님은 사랑은 없다고 믿었지만, 믿음이 약해졌는지 옆 방 이발소 아저씨랑 살림을 합쳤다. 그들은 1년을 살지 못하고 각자 자신의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다시 혼자가 된 뒤에도 둘은 티격태격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싸움 하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얼핏 들려오는 말로 누님의 엄마는 병원에 누워있었고 집안의 막내였지만 형제들은 누님에게 손을 벌린다고 했다. 집안 소식을 들은 날에는 어김없이 이발소 아저씨랑 더 크게 싸웠다. 돈은 멀리 있었고 이발소 아저씨는 가깝게 있었으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이발소 아저씨는 시장에서 사람들 머리를 깎고 감겼다. 아저씨는 머리를 깎으러 오는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10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시장 사람들은 평소에 친절을 받아보지 못해서 그의 끊임없는 친절이 불편했을까? 사람들은 친절한 그를 맹물이라고 하대하듯 불렀다. 퇴물 누님과 헤어진 뒤 10년 경력의 이발사를 때려치우고 새로운 삶을 찾아서 떠났다. 맹인행세로 구걸에 나서지만 토박이 걸인들에게 봉변을 당하고 다시 여인숙으로 돌아왔다. 퇴물이 자신의 일을 무시한다고 여기고 나선 길이었지만 도리어 퇴물에게 실망만을 안겨준다.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 함께 살 때 갖지 못 했던 감정을 갖게 된다. 아저씨는 옆 방 3류 영화감독이 시나리오 공모에 떨어져서 낙심에 빠져 여인숙을 떠날 때 그를 위로하기도 하고 퇴물 엄마의 병원비에 보태라며 돈봉투를 주기도 한다. 비록 건네는 방법은 서툴고 어색하지만 그 안에 담긴 투박한 마음은 정이 가득 담겨있다.
여인숙을 지키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동네 이웃인 김씨가 찾아온다. 정민은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고 요한은 몸도 마음도 아픈데 여인숙과 수퍼 운영을 누가 할 것이냐며 자신에게 넘기라고 한다. 시장통 유지 행세를 하는 김씨는 할머니 생전 인연을 들먹이며 은근하게 강요한다. 싸게 달라고 하지 않는다지만 정민네 형편을 이용해 여인숙을 거저 가로채려는 심산이다. 정민의 학교 학생 학부모도 찾아온다. 그는 자신의 아들과 정민과의 잘못된 소문을 이용해 정민을 협박해서 보상금을 챙기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의 아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정민을 협박하고 회유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정민은 여인숙과 수퍼를 지키고 김씨는 여인숙 매매를 포기하지만 김씨와 학부모 두 사람은 물욕에 눈이 먼 우리 시대의 자화상에 다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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