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진 한 장

너와 함께 바닷가를

 

 

 

 

 

 

 

기차는 5분 연착이었다. 잘 오고 있겠지. 조바심은 스스럼없이 일어났다. 언젠가 기차는 아니었지만 내려야 할 터미널을 지나쳐서 시외로 나가기 직전에 내린 적이 있었다. 그때 시외버스를 탔고 잠을 자다가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서 눈을 떠보니 버스는 시 외곽을 벗어나고 있었다. 놀라서 아저씨, 외쳤고 가방을 챙겨서 운전기사에게 뛰어가서 내려달라고 했다. 소심해서 타인에게 말을 잘 붙이지 못했지만 다급한 상황은 이런 성격이 사치란 걸 곧바로 증명해줬다. 운전기사는 짜증스럽게 뭐라고 하면서 길가에 버스를 세웠고 버스 문을 열었다. 버스가 운전기사의 짜증을 발산하듯이 길가에 멍청하게 서 있던 나에게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서둘러 떠났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조금만 더 갔더라면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할 뻔했다. 그때 어디를, 뭐하러 다녀오던 길이었을까. 그때 나는 아이의 나이쯤이었다.

 

기차가 5분 연착된다는 대합실 전광판을 보고 카톡을 확인했다. 아이가 출발할 때 보내온 기차 탔음, 이후로 별다른 톡이 없었다. 내가 보낸 역에서 기다리겠음,에 이어 아내가 보낸 조심히 내려와요,가 마지막이었다. 도착할 때가 다 됐는데 톡이 없는 걸 보니 그때가 떠올랐다. 최소한 출발 30분 전에 나가라든지, 자다가 도착할 데를 지나치지 마라든지 하는 말이 매번 나왔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알겠어, 알겠다고, 했다. 내려야 할 데를 지나치면 어쩌면 더 재밌고, 더 큰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인데 쓸데없는 걱정이 잔소리로 더해진다는 걸 알지만 습관처럼 나온다. 더군다나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밤늦게 다니니 더 그렇다요즘 서울 생활이 재밌는지 이번처럼 집에 둔 여권을 가지러 오는 일과 같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집에 오지 않는다. 친구들이랑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여권을 갖고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편으로 보낼 수도 있지만, 일부러 내려오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달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다.

 

여수엑스포행 기차가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에스컬레이터 앞으로 갔다. 에스컬레이터에는 고향에 다니러 오는 것 같은 아이들과 정원박람회를 구경 온 관광객으로 가득 차서 내려왔다. 마중을 나온 엄마나 아빠를 보고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고, 깃발을 든 관광 안내원 앞으로 관광객이 모여서 줄을 섰다. 에스컬레이터 끝에서 아이가 손을 흔들었다.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나를 보고 옷이 이게 뭐야, 눈에 제일 잘 띄잖아, 했고 남잔 핑크지, 하며 가방을 받아서 대신 메고 꼭 안아줬다. 점심때가 다 됐고 아내는 집에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어, 하는 아이에게 김밥이라도 사서 기차에서 먹지, 코로나 때도 아니고, 얼른 가자, 엄마가 맛있는 거 해놨을 거야, 했다. 집 떠나서 사는데 먹는 걸 잘 챙겨 먹어,라고 입이 닳아도 아이들이야 어디 그런가. 배가 고프면 먹고 아니면 말고, 하니 먹는 걸 소중하게 여기고 배웠던 일이 허투루 되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때가 되면 자신에게 힘이 되겠지.

 

오랜만에 주말 점심때에 모두 모였다. 아내는 열무물김치를 넣은 비빔국수를 큰 접시에 맛깔나게 담아서 식탁에 올렸다. 아이는 체질상 피부에 육식이 좋지 않다고 해서 의도하지 않은 채식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이나 일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밥을 먹을 때면 어려움이 있다. 요즘 밥 먹을 데를 찾아보면 대부분이 고기와 관련된 데가 아닌 데가 없다. 그리고 메뉴 선택하기도 그쪽이 쉽기도 하고.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힘들어서 짜증을 내기도 하더니 이젠 스스로 알아서 잘 조절하는 것 같다. 즐겁게 먹으면 0칼로리-그런데 즐겁게 먹으면 더 살로 가는 게 아닌가. 예전에 반찬 투정하면 그래갖고 어디 살로 가겄냐, 고 할머니가 말했는데-라는 말도 있듯이 스스로 즐겁게 주변 사람들에게 맞춰서 식당에도 가고 그런 모양이다. 어쨌든 아이는 부모의 걱정과 달리 스스로 잘한다고 하더니 그런 갑다, 하면서도 스무 살이 넘은 게 언젠데, 하는 생각은 늘 들었다가 또 잊히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 생각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상처가 되어 흔적으로 남았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 전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을 읽다가 메모를 했던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불가피하게 깊은 흔적을 남기고, 아이들은 그걸 찾아내고 해석하느라 평생을 보내기도 하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시드니와 소피아에게 남긴 흔적은 뭘까?” 불가피하게,라고 어느 정도 변명을 담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아이에게 깊은 흔적, 상처가 되어 남긴 흔적이 한두 가지였을까? 어쩌면 지금 어른이 된 우리도 여전히 그 흔적을 찾고 해석하느라, 여기에 더하여 자의적인 해석으로 괴로워하며 평생을 허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이에게 남긴 흔적이 많았을 텐데, 하는 생각은 나를 두렵게 만든다.

 

우리는 늦은 오후에 바닷가로 갔다. 아내와 캠핑을 할 때 사진을 찍어 아이에게 보내면서 같이 가자, 했었던 터라 우리가 캠핑 했던 바닷가로 함께 갔다. 소나무 그늘에 바닥 매트를 깔고 캠핑 의자를 펼쳐서 둘러앉아서 바다를 바라봤다. 사람들이 이른 여름 바다에서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바다로 다가갔고,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바닷가를 맨발로 걸었다. 갑자기 거센 파도가 밀려와서 접은 바짓단을 적실 때 놀라서 껑충 뛰었다. 우리는 꺄악, 소리를 지르며 파도를 피해 달렸지만, 바지는 이미 흠뻑 젖은 뒤였다. 우리는 해변 백사장 끝까지 발자국을 꾹꾹 찍으며 우리의 흔적을 남기거나, 또 다른 흔적인 사진을 찍으며 걸었다. 파도가 서둘러서 푹 파인 발자국을 지웠고, 모래밭은 다시 평평해졌다. 파도가 우리의 흔적을 지웠지만, 치명적인 흔적을 지우지는 못했다.

 

아이는 주말을 보낸 후 아침 기차로 서울로 갔다. 엄마에게서 딸로 이어지는 유전자의 이동은 강제하지 않아도 몸에 흐르는 게 확실했다. 명절 끝자리에 처가에서 나올 때 가방처럼 아이 트렁크에 마른 반찬이 가득 찼다. 아이가 손을 흔들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대합실을 나왔다. 여수엑스포발 용산행 아침 810분 기차는 연착 없이 정해진 시각에 도착해서 정해진 시각에 출발했다. 점심을 먹으려고 들어간 식당에서 핸드폰을 여니 카톡이 와있었다. 도착~.

 

'사진 한 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몽하리 라이딩  (1) 2024.04.02
베트남 다낭에서 바다를 보다  (0) 2023.05.18
추석맞이 콩쿨대회  (0) 2022.10.26
봄으로 가자  (0) 2021.03.12
그날 무대에 서다  (0) 2019.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