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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하나

저기 마지막이 온다

 

 

마지막은 왔다. 시작할 때 마지막이 올 거라고, 우리는 생각했을까? 처음이 있었으니 마지막이 오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그 마지막이 어떤 마지막일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른 마지막을 품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때 우리에게 마지막은 처음에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중간이 될 수도 있고, 막바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야말로 마지막에 마지막이 올 수도 있을 거라고, 나는 또한 생각했다. 마침내 그럴싸한 결말을 그리듯이 혹은 누군가 했던 말처럼 다행스럽게도 마지막에, 마지막이 왔다. 나는 마지막이 오면 어떤 마음이 들지 우리 한번 봐볼까, 하는 말을 이번 연극을 함께한 사람 몇 명에게 때때로 하고는 했는데, 누군가 마지막이 올까, 오겠죠? 하는 바람에 마지막이 조금 낯설었다.

 

그렇지만 막상 마지막이 왔을 때 마지막보다는 우리의 처음, 나의 처음이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처음에 누구랑 어떻게 시작했을까? 처음을 떠올리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기억력의 쇠퇴라는 육체적 제약이 많은 부분 작용했겠지만-이제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 되어버린 나이여서-마지막에 바라본 우리의 처음은 처음에 되뇌었던 마지막이라는 단어만큼이나 생경했다. 아니, 우리라기보다 나의 처음이 그랬다. 나에게도 분명 처음이 있었을 텐데. 처음. 시작. 그때.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들었던 마음, 드러냈던 모습 따위가 시간의 지평선 위에서 아스라하게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중략-

 

이런 두려움 속에서 나는 신을 찬미하고 신에게 선물을 바치던 제사에서 연극이 비롯됐다는 연극선생님의 말을 떠올렸다. 고대 이래로 신의 자리는 관객이었다. 신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던 자의 능력과 권위에 앞서서 먼저 자신을 찬미하고 자신에게 선물을 바칠 줄 알아야 비로소 신을 향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나는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이라도 받은 것처럼 생각했다.

마지막 공연을 하던 날 무대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나는 깊게 숨을 들여 마시고 길게 뱉었다. 내 눈앞에서 연극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연극은 무대에서 펼쳐지면서 동시에 사라졌고, 연극은 매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이었다. 다만, 사라지는 순간을 위해 할 수 있는 걸 다했는지, 그 사라짐을 위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는 마지막을 위하여 매 장면 자신 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쏟아부었는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기리지 못하고, 사라지는 순간에 대한 불신이 두려움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이러한 두려움이 없다면 흔적 없이 마지막이 찾아온다고 해도 충분할 것이다. 살아가는 일도 다르지 않아서 하루하루가 반복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마지막에 이를 것이다.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마지막이 내뿜는 강렬한 두려움으로써 마지막이 아닌 충분한 마지막을 위해서 자신을 먼저 찬미하고 오늘 하루하루에 모든 것을 쏟으며 살아야겠지. 연극처럼.

 

관객이 빠져나간 객석과 로비는 썰렁했다. 우리는 어두운 무대에서 자신이 서야 할 위치를 알려줬던 야광테이프를 뜯었고, 소품과 조명을 철거했고, 의상을 모아서 종이상자에 담았고, 대기실을 정리했다. 나는 극장 출입문에 붙은 포스터를 뜯어서 돌돌 말아 옆구리에 끼고 극장 옆으로 나와 야외극장 주변을 서성거렸다. 출입문을 잠그려는지 군청 담당자가 어깨를 움츠리고 뛰어왔다.

 

야외극장 객석 저 아래 무대의 대리석 바닥에 뒹굴던 낙엽이 회오리바람에 휘감겨서 솟구치더니 허공을 떠다녔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던 극장 뒤 산봉우리가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더니 이내 산 쪽에서 부는 거친 바람이 싸락눈을 흩뿌리고 지나갔다. 뒤풀이 안 가요? 꽃다발을 품에 안은 그 친구가 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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