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모 하나

기온(紙園)역에서 너를 만나다

 

 

 

 

옆길로 빠질 뻔하다가 아슬아슬하게 고가도로에 올랐다. 산중턱을 가로지르는 유료도로를 지나고 터널을 빠져나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속도로가 나타났다. 네비게이션이 안내를 해줘도 갈림길에서 살짝살짝 어긋나는 바람에 조바심이 올라오더니 마침내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왔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하자 교통량이 현저하게 줄었다.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버튼을 누른 뒤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고 앞쪽을 멀리 바라보며 한숨을 돌렸다. 부산에 왔다가 집에 갔다가 다시 부산까지, 이 길을 이따가 또 와야 한다니 내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어이없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왕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얼른 다른 방법을 찾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길 수밖에. 그래, 잘한 결정이야. 둘만 보낼 수는 없잖아. 모든 걸 내 이름으로 예약하기도 했고. 오른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왼팔은 운전석 문틀에 팔꿈치를 대고 손바닥으로 머리를 괸 채 혼자서 주문을 외듯 계속 궁시렁댔다. 옆 차선으로 아스팔트에 바짝 엎드린 노란색 슈퍼카가 부앙,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관광이든 여행이든 내가 살던 곳을 벗어나서 낯선 지역, 낯선 나라로 떠나는 일은 설렌다. 누군가는 집을 나서서 공항이나 항구, 기차역 따위까지 갈 때가 여행에서 가장 설레는 순간이라고도 했다. 이륙한 비행기가 하얀 구름을 뚫고, 출항한 배가 먼바다의 높은 파도를 넘고, 기적소리를 울리며 플랫폼을 벗어난 기차가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서 이웃 도시로 들어서면 그 설렘도 일상으로 느껴져서 둔감해지고 어느새 집으로 돌아갈, 현실로 다시 돌아갈 일에 갑갑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배가 오전 9시에 출항을 하니 늦어도 7시 반까지는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해야 했다. 은하수는 당일 새벽 일찍 출발하자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는지 나는 요즘 밤길에 운전하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밤이 되면 눈은 까칠까칠하고 뻑뻑해서 마주 오는 차의 헤드라이트 빛은 상향등이 아니어도 눈부셨고, 어깨는 무너질 듯 무겁고, 시도 때도 없이 하품이 나왔다. 더군다나 자주 가지 않은 길인 부산까지 장거리 운전은 더욱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부산항에서 가까운 데로 숙소를 정해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고, 배가 출항하는 전날 오후에 집을 나섰다. 마침 구빈이도 그날 오전 기차로 서울에서 내려와서 집에 있던 몇 가지 짐을 꾸렸고, 우리는 이른 저녁을 챙겨 먹고 곧 부산으로 향했다. 연말연시인데도 서울에 혼자 있을 구빈이를 생각하니 살짝 애틋해서 일부러 구실을 만들어 내려오게 했다. 오랜만에 가족여행으로 배 타고 일본으로 가보자,는 구실을. 이렇게 우리는 부산을 거쳐서 일본 후쿠오카로 향했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 야외 주차장은 무지하게 넓었다. 주차 요금을 할인 해준다고 해서 조금 걸어야 하지만 야외 주차장에 차를 댔다. 승선표를 받는 여객터미널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러이터 앞에까지 갔다가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차로 되돌아가서 멀찍이서 리모콘을 눌러 차 문이 제대로 잠겼나 다시 확인했다. 곧 돌아올 텐데도 집을 나서고, 차를 홀로 두고 가는 일은 마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휴지가 부족할 때처럼 깔끔하지 않다. 떠나면 그만일 텐데 구태여 남겨진 여러 가지를 믿지 못하고 미심쩍어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인데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것일 테지만.

 

배를 타고 부산과 일본 후쿠오카(福剛)를 오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부산항에서 저녁 7시에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 7시에 후쿠오카항에 들어가는 배가 하나 있고, 다른 하나는 오전 혹은 오후에 출발해서 3시간 30여 분 걸려서 후쿠오카항에 도착하는 배가 있다. 우리는 두 번째 배인 퀸비틀호를 예약했다. 비행기보다 시간은 더 걸리더라도 싸고 배에서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서 편안하다. 날씨가 궂어서 파도가 높으면 강력한 배멀미가 기다리고 있지만 사람마다 다르고 약도 있으니까. 그리고 일제강점기 관부연락선-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오가던 바닷길로 현재는 우리나라 업체인 부관훼리와 일본 업체인 관부훼리가 이 항로를 운영한다-에서 <사의 찬미>의 주인공 윤심덕과 김우진이 대한해협 검푸른 바다에 함께 몸을 던졌다고 알려진 미스터리한 사랑의 바닷길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보다는 우리나라를 짓밟았던 침략의 바닷길이었지 않았던가.

 

여객선터미널에서 표를 받아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배가 출항하려면 한 시간 반이나 남았지만 배를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일본 여행을 많이 간다고 하더니 실감이 났다. 사람들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보안검색대를 향했다. 구빈이와 은하수는 옆줄에 들어가서 대기했고, 나는 그대로 밀리는 대로 사람들을 따라서 들어갔다. 짐 검사를 통과하고 출국심사대 앞에 서서 여권과 승선권을 건넸다. 여자 직원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여권 유효기간이 지났는데요, 했고, 나는 예? 했다. 지난 4월로 유효기간이 끝났어요, 하길래 그런데요? 하자, 출국심사 직원이 이 여권으로는 출국할 수 없어요,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저번 5월에도 나갔다 왔는데... 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컴퓨터를 두드리던 직원은 여권이 하나 더 있는데요, 하자 그때야 생각이 났다. 유효기간이 만료되어 새로 여권을 발급받았던 것이, 구형이 아니라 표지가 짱짱한 파란색 신형 여권을 발급받아서 베트남 다낭 대회에 참가했던 것이.

 

일단 저쪽에서 대기하세요, 직원이 출국심사대 옆 구석진 공간을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말했고, 남자 직원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다. 자리를 옮기며 신형 여권이 등록되어 있으니 출력해서 가져가면 안 되나요? 하자 남자 직원은 안 됩니다, 뭐 높은 사람은 부산시청에 가서 바로 재발급 받아서 오기도 하는데, 옛날 말이고요, 실물 여권이 없으면 다른 나라에서 입국도 안 시켜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출국 자체가 안 돼요, 했다. 갑자기 갑갑해졌다. 우선에 구빈이 은하수에게 알려야겠다 싶어서 출국심사대 앞에 서 있던 구빈이를 불렀다. 구빈아! 조용히 하세요, 여기서 큰 소리 내면 안 됩니다, 하고 직원이 꾸지람을 놓듯 말했다. 나는 밀항하다가 걸린 불법체류자가 구금이라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빠르고 다급한 손짓으로 이쪽으로 오라고 둘을 불렀다.

 

은하수와 구빈이가 뭔일 있나 하는 놀란 눈으로 다가왔다.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는데, 얼른 결정하세요, 두 분만 배를 타시든지 같이 나가시든지, 곁에 있던 출국심사 직원이 말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떻게 하나? 직원은 계속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있었고, 은하수와 구빈이는 어떡해? 하며 동동거렸다. 모녀여행으로 둘이서 다녀올래? 했다가 우리나라도 아닌 데다 온갖 예약이 내 이름으로 됐다는 걸 생각하니 둘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불안했다. 내가, 그래도 오랜만에 나가는데 같이 가야지. 일단, 이 배로 먼저 가. 배가 안 되면 비행기라도 구해서 뒤따라 갈게, 하자 구빈이가 어느새 전화기를 뒤적이더니 비행기는 많이 있는데, 했다. 그래, 그럼 내가 퀸비틀 데스크에 가서 환불이나 다음 배 같은 거 물어보고 톡으로 연락할게, 했고 얼른 들어가, 시간 다 됐다, 하며 둘을 들여보냈다. 결정하셨어요?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하며 출국장 직원이 나를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출국심사대를 통과해서 안쪽으로 들어가던 은하수와 구빈이가 뒤돌아봤다. 우리는 서로 바라봤고, 나는 얼른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었고, 우리는 함께 돌아섰다. 언제나 뒤돌아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슬프다.

 

인터넷으로 예약한 배는 왕복 모두 취소해야 했고, 세금 관련된 부분만 조금 환불해준다고 했다. 급하게 구한 항공권으로 부산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서 후쿠오카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장은 우리나라와 중국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웹사이트에서 미리 입국, 세관 신고를 한 덕분에 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휴대폰을 껐다가 켜서 일본 통신사가 뜨는 걸 확인하고 카톡으로 도착했다고 알렸다. 고생했다며 보고 싶,다고 답이 왔다. 구글 지도를 보고 기온(祇園)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공항에서 가까운 역에서 세 정거장 거리였다. 관광객과 현지인으로 복잡한 무료환승버스를 타는데 대여섯 살로 보이는 아이가 넘어질 뻔해서 붙잡았다. 아이 엄마가 땡큐, 했고 아이에게 괜찮아? 했더니 한국분이시구나, 고맙습니다,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왔다. 차와 사람으로 북적이는 길 건너에 은하수와 구빈이가 보였다. 구빈아! 큰 소리로 부르며 달려갔더니 다가오면서 귀엽게 눈을 흘겼고, 은하수가 고생했지, 하며 안아줬다. 아침 일찍 부산을 떠나서 긴 시간 동안 먼 길을 에돌아서 우리는 후쿠오카 기온역 2번 출구 앞에서 만났다. 배에서 멀미도 안 했고, 숙소는 셀프 체크인으로 방에 들어갔고, 시내와 가까워서 걸어서 오다가 오래된 우동집을 발견해서 맛있게 먹었고, 무슨 유명한 라면집 본점이라는데 높은 건물의 유리창을 다 열고 공연도 하고 그리고, 집에 가서 여권 찾아서 다시 부산으로 가서 비행기 타고 그리고 또... 헤어진 지 열두 시간도 채 안 됐지만, 우리는 오래 못 만나 그리운 사람들처럼 서로 그 시간을 풀어놓기에 바빴다. 우리는 조금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후쿠오카 밤거리를 걸었다. 아주 오래된 옛날 영화 극장이 있어서 영화 포스터와 시간표를 보면서 기웃거렸고, 작은 간판을 건 선술집을 훔쳐봤다. 술에 취했는지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현지인 젊은 남녀 몇이 우리 곁을 스쳐 갔다.

 

낯선 곳, 기온역에서 널 만나는 일은 반갑고 환희 가득한 일이다. 늘 보고 듣던 너의 얼굴과 목소리는 단지 너의 얼굴과 목소리가 아니었고, 마주 잡은 손과 날 바라보는 너의 눈빛은 다만 손과 눈빛이 아니었다. 차가운 이국의 밤공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외로이 서 있는 너와 가만히 나에게 빛을 보내는 너의 온기는 처연하고 아름답다.

'메모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몽하리사람들 백제를 만나다  (4) 2024.11.05
봄이 온다  (1) 2024.03.26
두 남자가 꾸는 꿈  (0) 2024.03.02
저기 마지막이 온다  (1) 2023.12.22
캠핑의 추억  (0) 2023.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