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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몇 장

나에게로 가는 발걸음, 점점 잇크 미닛~!

 

 

 

"점점 잇크 미닛~!"

서툰 한국말로 열심히 설명하고, 잘 들으려 하고, 잘 웃었고, 늘 앞장서서 우릴 이끌었던  싼띱, 널 잊지 못할 거야!

 

지금은 안나푸르나를 찾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걱정하고, 설레던 처음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가 아니 내가 걸었던 길이 어디쯤인지,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내가 쉬었던 곳이 어디였는지, 이런 사실들이 내 기억에서 가물거리는 것은 마치 꿈에서 깨었을 때와 같다. 흔하게 회자되는 낮에 꾸는 꿈이 이와 같을까? 아, 내가 오르고 내려갔던 그 기나긴 길, 만났던 사람들, 놀라움과 경외의 눈으로 올려다봤던 눈덮힌 큰 산 그리고 스쳤던 많은 것들과 또다시 함께 할 수 있을까?

 

네팔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긴 줄을 서서 입국수속을 기다린다. 명색이 국제공항인데, 하는 생각을 한다. 입국수속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일일이 손으로 기록한다. 공항청사의 천장은 낮고, 의자와 책상은 손때가 묻어 번질거린다. 국내선을 타려고 포카라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의 옛 기차역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가방 몇 개를 걸치고, 자루를 곁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사과를 베어 먹으며 비행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서울에 가는 어머니, 아버지들 모습과 겹쳤다. 전기는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하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는다.

 

인천공항처럼 크고 으리으리하고 웅장한 건물은 나를 주눅들게 한다. 쾌적하고 빠르다고 자위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위축되고 적응하지 못할까 좌불안석이 된다. 오래되고 낡은 것은 나를 편안하게 한다. 실수를 저질러도 너그럽게 도와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볍다. 손때 묻어 번질거리는 책상과 의자, 깜박거리는 형광등과 지직거리는 텔레비전이 정겹고, 그걸 무심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반갑다.

 

 

 

 

 

 

 

 

 

 

 

 

 

 

 

 

 

 

 

 

 

 

 

 

 

 

 

 

 

 

 

 

 

 

 

 

 

 

 

 

 

 

 

 

 

 

 

 

 

외국에서 첫 밤을 보낸다. 호텔은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한다며 시설도 훌륭하다. 제복 입은 경비원이 두 명이나 정문을 지킨다. 몇 발자국만 나서면 녹슨 양철지붕을 예의 손때 묻은 기둥이 힘겹게 버티며 사람들을 품어 안는 구멍가게와 여염집이 즐비하다. 사람들은 별다른 할 일이 없어 동네를 서성인다. 그곳 호텔은 이미 사람들의 바다에 외따로 떠있는 섬이다.

 

여행사에서 준비해준 버스를 타고 트레킹 시작을 위해 1시간 반을 이동했다. 중간에 싼띱이 탔다. 메인 가이드인 박타와 보조 가이드 싼띱까지 트레커 5명에 가이드가 두 명이나, 하는 생각은 버스에서 내렸을 때 별것 아닌 게 되었다. 까레에 도착했을 때 짐을 옮겨주는 포터, 한국음식을 준비해준다는 주방팀까지 해서 예닐곱 명이 합류했다. 내 짐을 내가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생활이고 삶이 분명할진데 대신 짊어주는구나,한다. 설산 정상에 오르는 프로 산악인 같은 모습에, 이게 말로 듣고 안내지에서 봤던 것이구나,하고 생각한다. 끼니 때마다 식탁에 붙어 서서 살펴주는 걸 보며 밥을 먹는 불편한 마음은 네팔의 높은 실업률과 그 일에 가족의 생계가 달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합리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일정 내내 그들을 놀라움과 존경스러움으로 바라봤다. 발가락 슬리퍼에 청바지, 불편한 잠자리와 식사에도 늘 웃으며 짐을 머리에 묶고 이동했고, 우리를 안내하고 도와줬다.

 

그렇게 무심하게 높은 산에도 사람들은 집을 지었고, 부엌에 불을 지폈고, 허리 굽혀 땅을 갈고 있었고, 아이들은 콧물을 훔치며 연필을 움켜쥐고 있었고, 병아리들은 어미닭을 쫓아 종종거렸다. 낯선 동네이름에 기억하기 더 어렵다. 란드룩에서 트레킹 첫 밤을 보낸다. 롯지(Lodge)는 허름하지만 정갈하고, 색깔은 화려하며, 내용을 알 수 없는 진언이 새겨져 있다. 방문 앞에 걸려 있는 여행자들의 땀을 씻어낸 빨래를 보는 것만으로도 쉼을 느낀다. 긴 하루를 보낸 여행자들은 피곤한 발을 찬 물에 담그고 둘러 앉아 차를 마시고 얘기를 나눈다. 또는 맨발로 서성거리며 긴 호흡으로 산을 숨쉰다.

 

이른 저녁을 먹고 침상에 눕지만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끝내 방문을 열고 나와서 큰 산을 올려다 본다. 깊은 밤 보름을 막 보낸 달이 대낮보다 환하게 밤을 밝힌다. 낮 동안 산을 감싸던 구름은 달빛의 위세에 눌려 사라졌다. 달빛으로 보는 산은 한없이 높은 곳에서 우뚝 솟아있다. 그것은 차라리 두려움이었고 비현실적 영상으로 다가온다. 영하 20도에서도 따뜻하다는 침낭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뒹굴지만 잠들지 못 한다. 뒤척이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기 전에 한번 더 반짝이는 별을 올려다 본다. 새벽은 더디게 찾아오고 아침은 불쑥 우리 곁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산에서 이틀째 밤을 보내도 쉽게 잠들지 못 한다. 새벽 5시쯤 됐을까 하고 시계를 보면 2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다. 3시간 착각을 시차라고 생각한다. 겨우 그 정도 시차 가지고, 하더라도 아무튼 한국은 지금 새벽 5시다. 깊게 잠들지 못한 밤을 보낸 사람들은 아침이 반갑다. 롯지 주변을 산책하고, 카메라를 통해 산을 올려다 보고, 수건을 들고 세면장을 향한다. 

 

아직 길을 따라 늘어선 나무의 잎사귀는 넓다. 언제쯤 고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해발 3,000미터쯤은 가야 된다고 한다. 그곳에 갔을 때도 길은 걷기에 편하고 계단은 반질반질하게 잘 다듬은 바윗돌이었다. 사람들은 돌로 담장을 쌓고, 지붕을 올리고, 계단을 만들고, 마당에 깔았다. 우리처럼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탐방로를 만들지 않을까, 하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단다. 그저 길이 지나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직접 만들고 보수한단다. 넘겨짚어 혼자 해석하는 나는, 쉽게 볼 수 있는 롱다, 기도 제단 같은 것을 접하며 그들의 종교적 생활에서 그렇거니 한다. 손님이 오가는 길이니 그들만의 환대라고 여긴다.

 

언제인지 모를 부모배움 시간에 받아들었던 기도문 쪽지가 떠오른다. 네 이웃으로 인해 니가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모르고 살아간다, 정도의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는 기도문. 그때 나는, 내가 이웃을 대하는 태도와 어쩌면 이렇게나 닮았을까, 마치 나를 점찍어 준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저 무작위로 하나 골랐을 뿐이었는데. 하지만 여전히 이웃에 피해주지 않고, 나 역시 받지 않고 살아가는 나를 본다. 손님과 함께 하는 일도 힘들어 하며... 나는 누구와 더불어 살아 가고 있나?

 

트레킹 중간에 롯지에 도착하면 발을 높은 데에 올려서 풀었고, 대진이 형과 일명, 하프 샤워를 했다. 아, 높은 산 산장에서 즐기는 등목의 그 시원함이란! 날이 더우니 긴 길에 땀이 흥건하다가 수돗가에서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심장을 얼릴 지도 모른다. 포터들에게 같이 하자고 하니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낯선-물론 그곳에서는 한국인이 더 이상 낯설지는 않겠지만-이방인이 웃통을 벗어제끼는 모습이 흉물스러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양인이 보기에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또 같은 한국사람들이 보기에도. 하지만 뜨거운 여름날 일하고 우물가에서 어푸어푸하며 땀에 젖은 몸을 씻던 옛날 우리네 어른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일하지 않아서 보기에 흉했을까? 우리는 데우랄리 3,200미터에서도 머리를 감았다. 그 차가운 물로!

 

 

 

 

 

 

 

 

 

 

 

 

 

 

 

길을 따라서 걷다보면 드문드문 우리 성황당인가 싶은 기도하는 곳이 있다. 박타에게 물었다. 어떻게 기도하냐고. 주변에 떨어진 랄리구라스를 주워다 올리고 두 손을 모을 뿐이다. 대진이 형과 함께 꽃을 줍고 기도했다. 고산병이 오지 않게 해달라고, 떠나올 때 우리에게 환송했던 사람들에게 이곳을 기운을 전했을까? 지금 가는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곳이 어디이든 그곳에 내가 있어서 나를 만나기 원했을까? 혹은 나를 담아가서 그곳에 내려놓고 내려오려고 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안나푸르나를 작정했을 때 걷는 길이 나에게로 가는 발걸음이었으면, 했던 마음은 기억난다.

 

우리는 박타를 따라서 꽃을 줍고, 문설주에 올리고, 한 발 물러서서 두 손을 모았다. 대진형에게 물어볼 걸, 형은 어떤 마음으로 기도했어요? 트레킹 시작할 때, 중간중간에 그리고 산에서 내려온 마지막날 그 큰 나무 아래에서 두 손을 모을 때. 경박함과 가벼움은 먼 데 있는 게 아니고 더불어서 찾아오는 모양이다.

 

네팔의 국화 랄리구라스는 우리네 동백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잎사귀는 넓고, 꽃은 활짝 피었다가 그 상태로 툭, 떨어진다. 군락을 이루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길에는 즈려밟고 가라는 듯 깔려 있다. 꽃을 밟고 어찌 앞으로 나갈 수 있겠나? 난리부르스 구나 해서 랄리구라스인가, 하며 웃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날 공항에서 만난 아주머니들의 표현을 빌리면 안나푸르나 코스에 핀 랄리구라스는 아무 것도 아니란다. 에베레스트 코스를 가야만 제대로 트레킹을 느낄 수 있고, 랄리구라스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제대로 보려면 얼마나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하나? 아름다워지려면 얼마나 더 많은 꽃들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그대가 지금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아름다울 따름인데!

 

 

 

 

 

 

 

 

 

 

 

 

 

 

 

 

 

 

 

 

 

 

 

 

 

 

 

 

 

 

 

 

 

 

 

 

 

 

 

 

 

 

 

 

 

 

 

숙소였던 데울랄리 드림롯지에서 조금씩 머리가 아팠다. 이게 고산병인가 하지 않았으니 고산병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곳에 도착해서는 머리도 감았으니. 다음 날 이른 아침을 먹는다. 점심 때만 되어도 구름이 기세를 잔뜩 올려 산으로 달려든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구름을 본 적이 있다. 구름은 뭉게뭉게, 몽실몽실 피어 올랐다. 밟고 올라서고 싶었다. 손오공이 탄 근두운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구름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바람처럼 거칠게 달려 들었다. 금방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여러 봉우리를 뒤덮는다.

 

일찍 길을 나선 것은 눈 밝은 동행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오신 세 분은 백두대간 종주를 할 정도로 산을 좋아하는 분들이었다. 며칠 날씨를 봤는데 아무래도 아침에 일찍 가야 맑은 하늘과 안나푸르나를 볼 수 있겠다고 했다. 그 말이 맞았다. 더불어 그분들께 미안하기도 하다. 스틱 대신 길에서 주운 대나무를 들고 다녔고, 등산화를 벗어 던지고 운동화를 신었고, 길을 걷는 내내 시끄럽게 노래하고 웃었다. 맨발로 걸었고, 반팔을 입고, 바지를 걷고 걸었고, 스틱 없이 내려왔으며 시시덕거렸다. 그분들은 연신 발을 다칠까 염려했고, 썬크림을 바르지 않았다며 화상을 걱정했다. 말하지 않았으나 묵묵히 앞에 가는 사람의 뒷꿈치만 보고 걷는 등산인으로서 그분들 입장에서는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변명하자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큰 배낭을 짊어지고 편안한 일상복으로 걷던 서양인 남녀 커플이 떠오른다. 방향이 같아서 중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만났다. 그럴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나마스떼, 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쉴 때도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쉬는 모습이었고, 볼 때마다 활짝 웃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 자유로운 복장과 쾌활한 모습들, 여유로운 걸음걸이, 거기에 비해 만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가 전문산악인과 같다. 

 

산에서는 일기 변화가 심하고 그에 따라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도 하니 준비하는 일이 당연하겠지만, 과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곳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각국에서 모여드는 관광지였고, 등산보다는 트레킹 코스였던 것이다. 대진이 형, 우리 탈코리언 하기로 해요, 하며 몇 번을 웃었다. 마지막날 내려와서 완주를 서로 격려하며 네팔 맥주 에베레스트를 마시면서 서로 속내를 밝히고 미안함을 구했지만, 다시 미안하다. 허름한 구멍가게 탁자에 앉아 양말을 벗고 마시던, 미안함 뒤에 오는 에베레스트맥주의 그 시원함이란!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 뒷머리가 지끈거렸다. 모두의 걸음은 느려질 수밖에 없다. 해발 3,700미터이니 고산병 증세가 이런 건가 한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도중에 싼띱이 몇 번을 외친다. "빠츠 미닛츠 알람~"  5분 간 휴식이다. 느리게 걷고 자주 쉰다. 초코바를 나눠 먹는다. 황량한 계곡 사이를 걷는다. 멀리 점으로 보이던 베이스캠프 롯지가 손에 잡힐 듯 서서히 다가온다. 하지만 한참을 가야 한다. 싼띱이 말한다. 한 시간 남았어요! 뒤돌아보면 마차푸차레의 칼날 같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마차푸차레는 물고기의 꼬리라고 한다. 신성 시 하는 산이라 등반이 금지되었단다. 허가를 한다고 해도 아, 저 칼날 위를 누가 있어서 밟고 올라설까?

 

안나푸르나 정상을 가기 위한 베이스캠프는 따로 있다고 한다. 이곳은 트레커를 위한 베이스캠프다. 관광코스가 맞을 듯 싶었다. 하지만 4,100미터에서 두통은 심해지고, 사진을 찍기 위해 자세를 잡을 때마다 숨이 찬다. 사진을 찍으며 발걸음을 느리게 옮긴다. 우리나라 박영석 대장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안나푸르나에서 숨졌다. 펄럭이는 롱다를 걸친 추모비에서 기도를 한다. 눈 덮힌 칼날 같은 절벽을 왜 오르려 했을까? 정상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고 하니...엄두가 나지 않는 일은 막막하고 답답하다. 알 수 없는 질문은 답을 알 수 없다. 바람은 거세고 숨은 가쁘다. 하나, 둘 몰려들던 구름은 빠르고 거칠게 봉우리를 올라탄다. 가뿐 숨을 몰아 쉬던 구름은 순식간에 온 산을 뒤덮는다. 구름에 덮힌 높은 산과 거친 바람을 바라보는 눈빛은 시리다. 대진이 형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뒤늦게 나타나 눈이 시린지 자꾸만 부빈다. 눈동자가 빨갛다.

 

 

 

 

 

 

 

 

 

 

 

 

 

 

 

 

 

 

 

 

 

 

 

 

 

 

 

 

 

사람들은 내려갔다. 대진이 형과 더 머무르며 느리게 내려간다. 여기 오려고 일부러 왔는데, 금방 내려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대진이 형이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 우리 여기 오려고 왔잖아! 3,700미터 롯지에서 핼쓱한 모습으로 일행이 기다리고 있다. 두 분이 고산병이 심한 모양이다. 괜히 미안해진다. 서둘러 내려가시라 하고 우리는 그곳에서 더 쉬고 머문다. 조금 내려가니 우리나라 젊은 친구가 올라온다. 배낭 하나 메고 혼자서 왔단다. 여기서 자고 내일 새벽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간다고 한다. 어제도 혼자서, 포터없이 가이드하고만 온 우리나라 여자분을 만났다. 탈코리언 현상이 젊은 친구들한테는 흔하다, 하며 함께 웃는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빨래를 널고 아기를 키운다. 하긴 어디라고 그렇지 않을까. 더러워진 옷을 빨아서 햇볕에 바짝 말린 뒤 잘 개켜 옷장에 넣어 두고 꺼내 입을 때 살짝 남아있는 비누향을 맡는 일은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른다. 우리는 내내 양말이며 수건을 빨아서 배낭에 매달아 말리며 걸었다. 내 짐을 내가 짊어지고, 내 빨래를 내가 하며 걸어야 온전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그래서 남는다. 여행자로 온전하게 걷지 못한 탓에 다시 오게 만들 것만 같다.

 

요람을 흔드는 엄마의 손길이 너무 세서 아기가 없나, 하고 스카프를 걷어 봤다. 돌이 지났을 법한 아기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기 머리 위로 살짝 열린 스카프를 더 내려둘까 하다가 그냥 놔둔다. 엄마라는 이름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아기는 잠들고 엄마는 쉬러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누가 내 어미이고, 누가 내 형제인가? 하늘의 뜻을 알고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내 어미이고, 형제이다. 부모배움 시간에 들었던 말이 들린다. 혈육으로 메인 정리로 단지 숨만 쉬며 살아가는 일이 나의 일이니 매번 들린다. 하지만 더 이상의 울림이 없는 것 또한 나의 일이다. 요람에서 포근히 잠들지 못한 아기가 몸이 커서도 갖는 성장통이라고 치부하면 사춘기적 고민에서 머문 것일까.

 

그 아기를 뒤로 하고 싼띱이 외친다. "점점 잇크 미닛~" 출발 1분 전이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배낭에 담고 어깨에 걸친다. 3,000개 계단을 오른다. 거기로 가기 위해 한참을 내려가고 다리를 건넌다. 앞뒤로 걷는 사람들 걸음에 맞춰서 다리가 출렁거린다. 그 출렁거림에 알맞는 리듬을 탄다. 철근 사이로 보이는 땅이 아찔하지만 오를 계단을 보니 다리에 힘이 들어가 리듬을 잃는다. 3,000개 계단 중 700여 개를 왔을 때 대진이 형과 말한다. 우리 계단이 끝나고 중간 롯지까지 쉬지 말고 묵언으로 걷기로 해요! 요람에서 잠들지 못한 아기는 사라지고 마흔이 넘은 삐적 마른 사내 하나가 다가온다. 사내는 말하지 않고 땅만 보고 걷는다. 나와 더불어 걷기도 하고 앞서거나 뒤쳐지기도 한다. 뭐라 말을 건네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묻지만 입술만 우물거린다. 땀은 쏟아지고 다리는 휘청거린다. 나는 중간 롯지에 먼저 도착해서 대진이 형을 기다린다. 하프 샤워를 해야 하니까.

 

 

 

 

 

 

 

 

 

 

 

 

 

 

 

 

 

 

 

 

 

 

 

 

 

 

 

 

 

 

 

 

 

 

 

 

 

 

 

 

 

우리는 종점인 시와이까지 걸었다. 그곳에서 짚차를 타고 버스가 다니는 곳까지 간다. 맨발로, 젖은 운동화로 걸었지만 즐거웠고, 또 눈이 시려서 슬펐다. 시와이마을에서 안나푸르나 방향으로 열린 계곡을 보며 서 있는 나무가 하염없다. 그 나무 아래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고, 인사를 했다. 언제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해발고도가 낮은 곳에서 바람은 잠들었고, 햇살은 따가웠고, 할 일을 끝낸 사람들은 벅차다. 긴 시간을 서 있었을 나무 아래에서 대진이 형은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아 있다. 차가운 맥주가 미지근해진다. 형, 맥주 식으면 맛 없어져!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부르니 대답하지 않는다. 나무 끝이 잠든 바람에도 살랑거린다.

 

차 타고, 비행기 타고, 걸으며 다녀온 8일 동안의 안나푸르나 언저리는, 나에게로 가는 점점 잇크 미닛이었을까, 혹은 빠츠 미닛츠 알람이었을까? 지금 처음 자리로 다시 돌아와 묻고 있는 나의 물음에 내가 답을 해야 한다. 언제쯤 답을 할 수 있을까? 일주일, 한 달 후 아니면 내가 내 짐을 짊어지고 다시 걸으며 나마스떼를 천연덕스럽게 외칠 수 있을 때가 그때일까?

 

안녕, 싼띱!

잘 있어요, 박타!

나마스떼, 안나푸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