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물어 갈 때 사람들은 와온바다를 향해서 걸었습니다. 와온바다는 저만치 물러나 있었습니다. 물러난 자리를 바람이 대신했습니다. 먼 바다를 건너왔을 바람은 와온바다의 파도처럼 넘실댔습니다. 부드럽게 휘감으며 숨을 고르거나 세차게 몰아쳤습니다. 와온바다의 바람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풀숲을 헤치며 한바탕 놀고나서 앵무산을 향해 나갑니다. 사람들이 바람에 옷깃을 세울 때 풀숲 갈대는 제 몸을 맡깁니다. 바람이 갈대가 되거나 갈대가 바람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산이 가까우니 억새인가요, 바다가 바로 앞이니 갈대인가요? 그들은 그냥 함께 어울릴뿐이겠지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일은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니 모르는 일입니다. 와온바다에서 먼 바다를 건너온 바람을 풀숲에서 만납니다.
호수도서관에 몇 번 갔지만 유리창에 시가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요리책을 보며 아이에게 간식을 만들어준다고 약속했던적이 언제였을까, 이제는 하도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눈으로만 보고 입으로만 말하고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책이란 모름지기/ 나처럼 읽지 말고/ 아내처럼 읽을 일이다/ 눈으로만 읽지 말고/ 손발로 읽을 일이다" 선생님께서 오늘 여기 이야기장에 오신 까닭을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꼿꼿하게 앉으셔서 환한 웃음으로,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학교에서 선생이 아이들에게, 저는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아이들에게만 저곳을 바라보라고 다그친다. 선생이 아이들을 막고 있으니 뭐가 보이겠나. 가리키는 곳을 선생과 아이들이 같이 바라봐야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로 이해하지 않는다. 어른들의 행동으로 익히고 배운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사에 가려 예수를 보지 못하는 것도 같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일이 있을 때 아이에게 논리랍시고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했습니다. 아빠는 말을 너무 어렵게 해서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무안아닌 무안만 당한 일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런 습관을 되풀이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비단 아이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일만은 아니겠지요. 나를 둘러싼 모든 일들이 그러합니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와온바다로 가면서 은혁아빠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예전에 부모배움이 있거나 어떤 모임이 있을 때면 아이들이 거침없이 가운데로 뛰어다니거나 큰소리를 냈었는데 요즘은 통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억지로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놔뒀더니 요즘은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것 같다. 아까도 강연장에서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뭐라 소곤소곤 대고 조심히 다니더라...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알아 듣겠지요? 유심히 쳐다보는 아이들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배운다는 말은 그래서 지금 순간에도 유효합니다. 다만 놓치고 알아채지 못하는 우리들만 있을 따름입니다. 아니 제가...
우리는 각자 저마다 자신의 길을 갑니다. 자기 길을 가려고 합니다.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을 찾지 못해 좌충우돌하고 잘못 들어서서 부딪히고 깨집니다. 어른을 모시고 스승님을 찾아뵙는 일은 그래서 소중합니다. 우리 삶의 진리를 그분께서는 몸으로 살아오셨으니까 말입니다. 함께 일기장을 들춰내고 마음을 나누지만 단지, 일기 쓰고 나누는 일의 반복에 머물고마는 것은 몸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권정생 선생님과의 일화를 들려주셨습니다. 세례를 받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누구냐는 목사의 질문을 받은 할머니가 숙고 끝에 "내 오라비이시더!"라고 말했더니 세례를 받지 못했답니다. 할머니께서 "예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나도 아버지라고 부르니 예수는 나의 오라비 아닝교?"라며, 세례를 못받아서 천당가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을 하자, 권정생 선생님께서 오빠빽이 있는데 뭔 걱정이냐고 하셨답니다. 예수께서 곁에 계셨다면, 그래서 내가 이땅에 왔다라고 말씀하셨을 거라 합니다. 교리에 가려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아둔함을 꼬집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하늘에서 온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에 국한되지 않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리를 일깨워주십니다.
선생님과의 이야기 장이 끝나고 평화학교에서 사랑어린학교까지 지난 10년을 함께하신 현수아빠, 작은별께서 10년을 정리하고 지금 우리 모습과 생각이 담긴 제안을 하셨습니다. 우리지역에서부터라도 생존경쟁의 교육현실을 벗어나 모두 같이 배움의 길을 가는 교육으로, 그 안에서 같이 길동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우리는 와온바다를 향해서 걸었습니다. 와온바다로 가는 길에 가을이 여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볏단을 묶는 가족이 있었고,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논에서는 콤바인 궤도 자국이 아직 어지웠고, 경운기보다 작은 관리기 짐칸에 햇볕에 말린 벼가마니를 힘들게 싣고 계신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와온바다 건너 산 너머로 해가 뉘엇뉘엇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해를 따라서 느긋하게 걷거나 벼가마니를 들어올리며 걸었습니다. 와온바다 앞에 섰을 때 해는 이미 사라지고 여운만이 짙게 남아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길동무입니다. 다만, 내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어깨를 겯고 가는 사람들은 아름답습니다. 정작 앞만 보고 가는 그들은 모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리지어 있으면 더 그러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아름답습니다. 저 와온바다 너머 노을이 붉어지는 그곳으로 길동무 되어 마음을 모아, 다시 앵무산을 내려올 바람에게 실려보냅니다. 사랑어린배움터 10주년이 되는 밤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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