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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하나

월하야행月下夜行 연하정담年賀情談

 

 

달은 우리 동네 뒷산 너머에서 올라와 바다 위를 지나 바다 저편 동네 산 너머로 진다. 보름이 지나고 달포가 지나면서 달은 모습을 바꾸고, 바닷물은 높낮이가 달라진다. 보름달이 뜰 때나 칠흑-동네 앞 카페와 펜션, 골목 가로등 빛 공해는 논외로 치자. 가치가 없으니-같은 그믐 때 바닷물은 도로 옆 방파제를 넘실대고, 달이 확연한 경계로 반으로 갈릴 때 바다는 경계를 내주고 무한한 갯벌이 된다. 12월 겨울밤에 땅과 바다, 하늘은 하나인 듯 몽롱하고 북쪽에서 부는 바람만이 허물없이 넘나든다. 사람은 그 안에서 다만, 침잠할 뿐이다. 우리 동네에 밤이 왔다.

 

코로나로 몇 해째 소란스러운지 모르겠다. 세상은 소란하지만 우리-구빈이는 타향살이 중이니 정확히는 아내와 나-는 별이 총총한 어느 밤처럼 안온하다. 세상 시류에 따라서 흔들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어서 우리만 평안하고 조용하다고 하는 것은 다소간 무리가 있지만. 이런 안온함은 코로나로 인해 사회가 급격하게 변하는 중이니 그에 맞춰 적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적응이라면 사실, 좀 바람직스럽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이 빨리 끝날 때면 운동장을 몇 바퀴 돈다. 코로나 이후로 회식이나 저녁식사 자리가 없어지니 일찍 귀가하거나 달리기를 한다. 달리기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처음 며칠은 다리가 무겁고 온갖 근육이 땡기고 힘들다. 그렇지만 이걸 이기고 계속 달리면 몸이 적응한다. 달리기를 하지 않은 날에 오히려 몸이 무겁다. 저녁밥도 맛있고, 잠도 새벽녘에 깨지 않고 아침까지 푹 잔다. 30대 초반부터 달리고 있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는 후천적으로 익힌 습관 중 가장 유익하다고 했다. 나에게 코로나가 가져다준 좋은 습관이다.

 

이렇게 달리기를 하고 집에 와 현관문을 열면 밥솥에서 압력이 빠지는 쉭쉭 소리와 밥 냄새가 훅 끼친다. 몸을 씻지 않고 밥부터 먹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따끈한 밥에 김을 싸서 먹으면 그만이니 아따 반찬은 필요없당께, 불 앞에 선 아내를 다그치지만 아내는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얼렁 씻고 와, 핀잔을 안 들으면 다행이다. 젖은 머리카락을 닦으며 밥상 앞에 앉는다. 아내의 정성과 따로 또는 같이 보낸 오늘 하루가 밥상에 고스란히 놓여있다.

 

옆집 개는 언제부턴가 쇳소리를 내며 짖더니 이제 짖지도 않는다. 이사를 온 뒤 몇 해 동안 들리던 우렁찬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골목을 오갈 때면 깜짝 놀라기 일쑤였는데 요즘은 자기 집에서 얼굴을 내밀지도 않는다. 보름달이 뜰 때 컹컹 짖는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다니. 오늘도 저녁밥을 먹고 동네를 한바퀴 돌러 나서다가 개도 세월은 피할 수 없그마, 한다.

 

겨울 바다는 오리떼 소리와 새 소리로 가득 찬다. 순천만 쪽에서 들리던 소리는 겨울이 깊어갈수록 우리 동네 앞쪽 바다로 내려와서 더욱 크게 들린다. 바닷가를 걸으며 청둥오리겠지? 라는 아내 물음에 잘 모르니 단지 글겄제, 하고 만다. 잘 모르니 아는 척 덧붙인다. 오리떼는 겨울만 찾아다닌갑써, 우리나라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면 시베리아 어디로 간다든디... 초록이는 연극을 하나? 그리고 매일같이 산책길에서 만나는 두 분을 마주치며 인사한다. 오늘은 덜 춥네요. , 어제보다 낫네요. 추울 때면 오리털 파카-청둥오리 이야기를 하는데 오리털로 만든 파카라니!- 주머니에 서로 손을 넣고 걷는데 오늘은 덜 추웠다. 이런 날은 새로 생긴 카페에 손님이 좀 있다. 하긴 추운데 누가 돌아다니고 싶겠나.

 

겨울밤은 달빛이 더 비치고, 별이 더 반짝이고, 파도 소리는 더 크고, 오리떼가 더 꽥꽥거리고, 공기는 더 싸하다. 겨울밤에 산책을 하면 코끝은 아리고, 볼은 뜨듯하고, 마주 잡은 손은 따뜻하고, 바람은 청명하다. 공원 계단을 오르는데 저녁밥이 소화되는지 방구를 뿡뿡 뀐다. 그리고 내년-나는 오십 몇 살이고, 나도 오십 몇 살이네 하며-에도 지금처럼 맛있게 저녁밥을 먹고, 추워서 집 밖으로 나가기 싫지만 나오면 좋은 동네 한바퀴를 돌고, 방구를 뿡뿡 뀌면서 살자고 서로에게 말한다. 얼마 전 다친 팔 때문에 걸치기만 한 파카를 아내가 여며준다. 괜히 미안해서 괜찮은디, 한다. 때마침 바람이 분다. 팔을 넣지 않은 파카 왼쪽 팔이 바람에 팔랑인다. 아내가 왼쪽 팔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따시제? 해서 이! 한다.

 

집이 작으니 동네를 한바퀴 돌고 와도 온기가 그대로다. 긴 겨울밤을 위해 난로에 장작개비를 하나 더 넣는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끓여서 차를 우린다. 장모님께서 돼지감자와 여주를 말려 차를 만들어줘서 시시때때로 우려서 마신다. 여주의 쓴맛을 돼지감자가 다스려서인지 맛이 구수하니 좋다. 차가운 몸이 스르르 녹으며 온몸이 따뜻해진다. 여주를 환으로도 만들어주셨다. 재작년인가 건강검진에서 당뇨에 진입하기 전 수치라며 조심하라는 병원 안내문을 받았다. 아내가 놀라서 나의 일회성 식습관을 바꾸도록 도왔고, 장모님께서는 당뇨에 좋은 몇 가지를 만들어서 보내셨다.

 

아내와 둘이 돼지감자와 여주 차를 꼭 쥐고 후후 불어서 마신다. 그리고 타향살이 중인 구빈이와 통화를 한다. 요즘 들어서 먹는 것과 숙소 때문에 스트레스가 있을 텐데 잘 견디고 있어서 대견하다. 2학기 기말고사 기간이기도 한데 잘하고 있겠지, 하는 말에 아내가 내 후배 A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한다. A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오기 부리지 말아라, 라는 말씀을 늘 하셨고 지금도 두 가지를 품고 산다고 한다. 좋은 아버지를 두셨네, 하니 방금 부러워하지 말라니까, 해서 함께 웃는다. 우리는 구빈이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남을 따라 할라고 하지 말고 지금처럼 잘살면 되지 않을까, 한다. 두 번째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돼지감자와 여주 차를 더 마신다. 밤은 깊어가고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가끔 바람이 창을 흔들 뿐 고요하다.

 

코로나로 오히려 겨울이 포근해졌고, 어느 정치인 구호처럼 저녁이 있는 삶을 찾았다. 코로나 이전에 일이 끝나면 이런 핑계와 저런 이유로 밥 먹고 술 먹으며 시내를 배회하던 모습이 파도에 휩쓸리는 조각배 같아 보인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일은 돌아가는데. 밤이 밤다워지면 추운 겨울날도 포근해진다. 낮에 몸과 머리를 쓰며 바쁘게 살다가 밤이 되면 감성적이고 마음을 대면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다시 낮에 충분하게 하루를 산다. 그래서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 라고 말했고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은 밤이 선생이다, 라고 말한 모양이다. 그러니 우리, 내년에도 저녁밥을 먹고 달빛 아래 밤길을 걷기로 해요. 몽사_바람개비 <몽하리사람들> 5호 2021.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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