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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하나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2022년 새해가 됐다. 아침에 달리기를 해서 조금 이른 시각에 아침을 겸해 점심을 먹는다. 브리카 안에서 커피가 끓어 넘칠 듯 칙칙 소리를 내고 향을 내뿜는다. 맑은 햇빛이 유리창으로 비치고, 바람이 있는 듯 없는 듯 담 너머 대나무 잎이 살짝 흔들린다. 동네 앞바다를 둘러싼 고흥반도 산꼭대기까지 선명해서 바다는 오늘따라 유독 호수처럼 보인다. 창밖은 차갑지만 청명하고, 식탁 위는 따스하다.

 

새해 첫날 동네를 한 바퀴 달렸다. 우리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돌면 6km가 조금 못 된다. 느지막이 나와서 그런지 어제 일기예보와 달리 그다지 춥지 않다. 뉴스프로그램의 기상 유튜브 클립에서 연말연시 최강 한파라고 해서 달리기를 할까, 말까 했었는데...

 

어제, 2021년 마지막 날에 우리집에서 와온바다 노을을 구경하고 해랑온실에서 소식지 5호를 함께 나눴다. 늦게까지 술잔은 끊임없이 돌았고, 말은 말을 덮으며 온실이 들썩였고, 거나한 노래는 별까지 닿을 듯했다. 그런 차에 늦게 잠들어서 평소보다 달리는 거리와 속도를 줄이기로 마음먹고 출발한다.

달리기는 빨리-평소 내 페이스보다-달리기는 당연히 어렵지만 느리게 달리기도 어렵다. 자기 페이스가 있어서 어느 정도 몸이 풀리면 느리게 달리려고 해도 빨라진다. 몸이 스스로 제 페이스를 찾아간다. 느리게 달리려면 이것을 제어해야 한다. 내 삶에서 관성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이것뿐일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더 천천히,를 마음속으로 되뇐다. 오늘은 천천히 달리는 날이다. 내리막길을 느리게 달려 편의점 앞을 통과한다. 젊은 사람 몇이 슬리퍼와 롱패딩 차림으로 바닷가를 배회한다. 연말연시를 펜션에서 보내고 있는 모양이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종아리가 허옇다. 젊음은 열을 발산하는 것이지. 바닷물은 편의점 앞 방파제를 넘을 듯이 찰랑거린다.

 

집 앞 공원에서 출발해 와온4반 복지관 앞을 지나면 2km 남짓이다. 추울까 봐서 귀마개로 귀를 덮고 버프로 얼굴을 감싸니 목덜미에 땀이 나고 머리에 열기가 오른다. 새로 생긴 기업형 펜션단지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도로변에 오뎅, 호떡 간판이 서 있다. 어느 집에서 울타리에 걸쳐 호떡 판매대를 차린 모양이다. 펜션에 머문 사람들이 호떡이며 오뎅꼬치를 들고 바닷가를 거닌다. 어르신 한 분이 방파제 앞에서 각굴망태를 놓고 파는데, 관광객 중 누군가 만 구천구백 원에 줘부씨요, 한다.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겨울인 걸 확인하듯 공기는 싸하고, 하늘은 파랗다. 도로 옆 갈대밭 속에서 청둥오리떼가 날아오른다. 푸드득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오리떼가 대열을 이뤄서 한 마리처럼 난다. 저 오리떼 앞 어딘가에 초록머리가 있겠지. 아니, 벌써 지구 끝 멀리까지 갔을까?

 

바다를 낀 마을 앞 도로는 사람이 걷거나 달릴 수 있는 여유가 있게 넓다. 하지만 상내마을 앞을 지나 순천판 삼거리, 유룡마을, 와온마을 입구까지 가는 길은 좁아서 여유가 없다. 이 도로를 은하수와 걸을 때도 좀 넓히거나 옆을 정리해서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면 좋을 텐데, 했다. 그러니 달리기를 할 때 차가 진행하는 방향보다는 차를 마주 보며 달린다. 앞에서 차가 오면 운전자를 쳐다보며 달린다. 도로를 걸을 때도 마찬가지로 운전자를 쳐다봐야 한다. 우리는 서로가 사람이란 걸 확인하듯 눈을 마주쳐야 한다. 그래야 서로 배려하듯 도로에서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복잡한 도심에서 운전을 하며 차선을 변경할 때도 깜빡이만 켜서는 길을 잘 비켜주지 않지만, 유리창을 내리고 팔을 뻗어서 흔들면 의외로 잘 비켜준다. ! 저기에 사람이 있구나, 하고 인식하는 게 아닐까?

 

새해 첫날이지만 여느 날과 다르지 않다. 난로에 장작이 활활 타고 있고, 유리창으로 쏟아진 햇살에 먼지가 살짝 피어오르고, 라디오에서 음악이 흐른다. 은하수가 청소를 하고 점심을 준비했다. 나는 달리기를 하고 은하수만 집안일을 도맡아서 하니 내심 미안하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동민이가 안다면 뭐라고 할까?

 

점심치고는 빠른 편이지만 햇살이 쏟아지는 식탁을 마주하고 무 된장국을 먹는다. 무 된장국은 시원하고, 엊그제 목영이 엄마가 주신 취나물도 신선하다. 냉장 보관해 필요할 때 꺼내서 나물로 무친다고 한다. 진짜, 무는 안 들어가는 데가 없고 별 반찬이 다 있네이, 하며 삶은 무채 나물을 숟가락으로 퍼먹는다. 무를 얇게 썰어서 간장으로 졸인 것도 맛있는디, 하자 은하수는 그건 자기 집에서 처음 봤어, 엄만 그런 건 안 만들었는데, 한다. ! 고춧가루를 뿌리고 간장에 졸인 얇고 동그랗고 겹겹으로 쌓인 무선, 맛있는디...

 

등산용 버너 위에서 브리카가 커피를 뿜어댄다. 어찌나 세게 내뿜는지 저 힘이 기차를 움직이는구나, 한다. 커피향이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살 사이로 퍼진다. 바다는 잔잔하고 고흥 팔영산을 덮은 하늘은 맑고 청명하다. 라디오에서 바흐 곡이 나오고, 진행자 건강을 걱정하는 청취자 사연이 들린다. 내가, 꼭 저렇게 유명한 사람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어이, 하자 은하수는 라디오 사연이니까, 한다. 바흐와 가운데 이름만 다른 아들의 음악이 흐른다. 바흐는 생활이 곤궁한 속에서도 자녀를 스물이나 낳고, 생활의 방편으로 끊임없이 음악을 만들었다고 한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말을 바흐도 알았을까? 설마 음악의 아버지인데... 아버지이니까!

 

이런 쓸데없는 얘기를 하며 밥을 먹는 사이 카톡은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사진과 글을 보여준다. 어느 산에서, 어느 바다에서 찍은 일출 사진, 기념사진이 올라오고 덕담이 오간다. 새해가 됐구나. 그래, 새해니까 첫날이니까 여느 날과 달라야지.

 

나만 운동을 한 미안한 마음으로, 밥 먹고 소화되게 동네 한 바퀴 돌까? 호떡집도 생겼던디, 하니 그래, 그리고 동네 가운데 길로 용화사까지 갔다 와서 구빈이 마중 나가면 되겠네, 한다. 부산에서 친구들과 연말연시를 보낸 구빈이가 오후에 기차로 오기로 했다. 예전에 연말이 되면 누가 연기대상을 받고, 누가 가수왕이 되는지, 보신각 타종까지 밤새워서 텔레비전을 봤던 기억이 난다. 구빈이도 지난밤에 친구들과 그랬을까? 하루 사이에 2021년은 작년이 됐고, 2022년은 올해가 됐다. 이렇게 새해 첫날이 지나간다. 몽사_바람개비 <몽하리사람들>6호 202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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