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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하나

낮잠

 

 

 

오늘은 수영장에 가지 말고 머리를 깎을까요? 아내가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며 말했다. 고관절을 다쳐 퇴원한 지 1년이 넘어도 수영장 물에 들어가고 나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꾸준히 다니려고 노력했으나 오늘은 몸이 무거워서 수영을 쉬자고 조영감이 먼저 말할 참이었다. 조영감은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러자고 했다. 아내는 이발도구를 챙겼고, 조영감은 의자에 앉아 가래가 끓어오르는 숨을 골랐다. 언제부턴가 미용실에 가지 않고 아내가 머리카락을 잘랐다. 자른다기보다는 전기바리캉으로 밀었다. 가위질로 헤어스타일을 만드는 게 아니어서 아내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다. 몇 가닥 남지 않았고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져서 그게 여러모로 편했고, 헤어스타일이란 말도 낯선 말이 되었다. 말끔하면 그걸로 됐지, 하는 생각을 하자 수영을 하고 나왔을 때처럼 개운함이 밀려왔다.

 

시립 수영장은 구식 시설이어서 물이 깨끗하지 않다고들 했지만, 수질을 정화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라고 담당 공무원은 한결같이 말했다. 신설 수영장은 통유리창으로 햇빛이 물속까지 비치고 하늘이 보였다. 물이 투명해서 수영도 잘 되는 거 같았다. 하지만 조영감 부부가 다니는 시립 수영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해서 만든 수영장이었고 지하에 있었다. 오래돼서 불편하기도 하고 오래돼서 편안하기도 했다. 수질이야 시립 수영장에서 배탈이 났다거나, 피부질환이 생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기준에 적합할 것이었다. 겨울에 물이 너무 차갑거나 샤워 시설과 지하까지 오르내리는 게 불편했지만 조영감 부부는 꾸준히 시립 수영장을 다녔다. 결혼 전 연애를 할 때부터 같이 수영을 배우기 시작해서 아이를 갖고서도 수영장을 다녔다. 회원들이 만삭인 아내의 배를 부담스러워할 때쯤-발차기를 하다 혹시 배를 찰지도 모른다는 회원들의 걱정 때문에- 아내는 쉬었을 뿐이고 출산 후 결혼 50년이 넘어서도 수영을 했다. 조영감은 25M 풀을 서른 바퀴 이상 돌고, 바다에서 파도를 타며 헤엄을 칠 때도 있었다. 이제 접영이나 평영을 하기에는 뼈가 달그락거렸지만 느릿한 자유형과 편안한 배영으로 물에서 몸을 놀리는 정도여도 좋았다.

 

조영감 부부는 늦은 아침을 먹고 수영으로 몸을 놀리고 나른한 몸으로 낮잠을 잤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몸을 놀리는 것이 주된 일과였다. 수영장을 오갈 때 조영감이 운전을 했다. 시립 수영장 주차장은 출근 전이나 퇴근 후 직장인이 붐비는 때를 제외하면 늘 여유가 있었다. 수영장뿐 아니라 실내체육관과 운동장이 있는 시립 체육시설 단지여서 붐빌 때면 조금 걸으면 됐다. 조영감 부부는 한가한 오전에 수영장에 다녔으므로 주차에 대해 어려움이 없었다. 더구나 운전 경력을 헤아리기에도 어려웠으므로 주차에 특별히 신경을 쓴 적도 없었다. 그날도 수영장에 도착했을 때 주차장은 여유가 있었다.

 

두 손으로 이걸 잡고 모니터를 보시고 그대로 따라 하세요. 운전면허 적성 검사를 담당한 검사장 직원은 조영감을 부축해 자리에 앉히며 주의 사항을 말했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굵은 S자 실선이 양쪽으로 서서히 올라갔다. 비행기 조종간처럼 생긴 손잡이를 양손에 쥐고 스위치를 누르며 S자 실선을 따라갔다. S자 실선이 멈추면 멈추고, 움직이면 움직였다. S자 실선 위를 정확하게 빠르게 또는 느리게 따라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때 우리나라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이 세계에서 가장 쉬운 운전면허 시험이라는 비아냥을 받았다. 면허증 소지자가 늘어나면 대기업 자동차 판매량이 늘어나고, 이것은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목적이었다. 면허증 소지자를 대상으로 하는 정기적인 운전면허 적성 검사도 마찬가지로 형식적이었다. 결국 운전을 시작하기는 쉬웠으나 사고율은 높았다. 그리고 노인 인구 증가로 노인 운전자의 교통 사고율도 점차 높아졌다.

 

교통 당국은 운전면허 시험과 적성 검사를 강화했고 조영감은 강화된 적성 검사에서 탈락했으며 결정적으로 수영장 주차장 사고가 주된 요인이었다. 여든이 넘은 운전자가 사고를 냈을 때 적성 검사 주기와 상관없이 사고 직후 적성 검사를 받도록 법규가 바뀌었다. 법규 개정의 주요인은 급발진이라고 주장하는 교통사고의 운전자 중 꽤 많은 수가 노인 운전자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침 조영감은 여든이 됐고 사고를 냈다. 적성 검사장에 갈 때는 조영감이 운전을 했지만, 올 때는 아내가 운전을 했다. 적성 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으면 현장에서 즉시 운전면허를 반납해야 했다. 조영감은 조수석에 앉아 주변 풍경이 지나는 걸 물끄러미 봤다. 시간의 강물이 흐른다면 이와 같겄제, 생각했다. 괜찮아요. 그까짓 게 뭐라고. 어디든지 내가 모시겠습니다요, 영감님! 아내가 넓은 길로 나오자 속도를 올리며 말했다.

 

그날은 수영을 끝내고 면도를 해서 깨끗한 얼굴로 나왔다. 다른 운동도 그렇겠지만 수영은 운동 후에 샤워까지 끝낼 수 있어서 더욱 개운했다. 그날은 유난히 몸이 가벼운 것 같아 마음먹고 자유형 몇 바퀴를 더 돌았다. 아내를 기다렸다가 수영 가방을 들고 계단을 올라 프론트로 나오자 배드민턴 가방을 걸친 젊은이 한 떼가 몰려왔다. 차가 많네, 주차장을 보며 아내가 말했다. 주차장이 복잡했다. 배드민턴 대회가 열린다고 프론트 직원이 알려줬다. 수영장 2층에 배드민턴장이 있었다. 대회에 참가하는 차가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조영감이 시동을 걸 때 차 몇 대가 기다렸다. 조영감은 조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멈춰서 그르릉대는 승합차와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운전자가 신경 쓰였다. 차가 빼곡했으므로 앞뒤로 차를 몇 번 움직이며 여유 공간을 만들어서 주차장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그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차 안에 가득했다. 마치 K2 소총을 쏘는 것 같았고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조영감은 깜빡 정신을 잃었고 응급실에서 깨어난 후에 알았다. 주차할 데를 찾던 앞 차가 후진하는 걸 보지 못하고 가속페달을 밟았고, 알았을 때 너무 늦게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그것도 가속페달이었다는 것을. 조영감은 운전면허증을 반납했고, 아내가 운전을 전담했다.

 

? ......자는 거예요, 영감님? 아내는 바리캉 스위치를 끄고 어깨를 살짝 주물렀다. 으음, 앓는 소리를 하며 실눈을 뜨고 어깨에 얹은 아내 손을 쓰다듬었다. 기름기가 다 빠진 손은 뼈 마디마디를 따라서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내도 어느덧 여든이 넘었다. 긴 겨울이 끝나는지 살짝 열린 유리창 틈으로 바람이 부드럽게 흘렀고,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른 날 같으면 수영장을 다녀와서 낮잠을 한숨 잘 시간이었지만 머리카락을 다듬는 바람에 가만 앉은 채로 스르르 눈이 감겼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만져주면 늘 노곤하게 몸이 풀어졌고, 눈꺼풀은 무거웠다. 머리카락을 다 자른 뒤 머리를 감고 말릴 때면 머리만 아니라 몸이 개운했다. 미용사가 아내로 바뀐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영감님, 청년이 다 됐네. 아내가 거울을 보여주며 말했다. 아내가 목에 두른 보자기를 풀어내고 신문지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담았고 옷섶에 떨어진 머리카락 몇 가닥을 훔쳤다. 조영감은 거울에 비친 조영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릴 적 이발소 의자에 빨래판을 놓고 이발을 할 때면 살갗에 붙어 따갑게 찌르던 머리카락이 이젠 없었다. 고향 동네 어귀에 있던 이발소의 이발사는 유난히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고 부드러웠고 콧수염이 멋졌고 파마머리였다. 긴 손가락 사이에 낀 바리캉을 목덜미에 들이대면 차가운 금속성에 목이 움츠러들었다. 그럴 때면 이발사는 부드러운 왼손으로 어린 조영감의 머리를 곧추세워줬다. 그리고 째깍째깍 바랑캉을 밀고, 가위질을 하고, 연탄난로에서 끓던 물을 부어 머리를 감겼다. 높은 빨래판 의자에 앉아 머리를 말리며 쳐다본 거울에 비친 모습은 어색했다. 어린 손자 손을 잡고 온 할머니는 우리 손주 휜칠해져불었네, 했지만 물에 젖어 축축한 옷섶 안에서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발사는 콧수염에 파마머리였는데 거울에는 매번 똑같이 각이 진 스포츠 머리에 시커먼 얼굴이 있었다. 콧수염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난 왜 맨날 스포츠야,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지금은 매번 똑같은 빡빡머리다.

 

씻고 한숨 주무실래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한 번 굳어진 자세를 다시 바꿀 때면 느리고 오래 걸렸다. 아내의 부축을 받아 화장실로 향했다. 햇살이 길게 들어와서 구부정하고 힘없는 그림자가 앞서서 화장실로 천천히 들어갔다. 오후에 몸을 놀리는 일은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조영감은 생각했다. 오후가 되면 운동 삼아 텃밭에서 움직였다.

 

텃밭이라고 해봐야 고랑이 두 개쯤 나올까 말까 하고, 길이는 몇 걸음 되지 않는, 땅이라고도 할 수 없는 크기였다. 그마저도 그늘이 져서 해가 잘 들지 않았고, 그러니만큼 집도 작았다. 딸은 가족을 이룬 후 어느 명절에 들렀을 때 방에 오르내리는 일이 힘들다고 했다. 그럴 법도 하지. 어릴 적에야 다락방이 낭만적이고 재밌지만, 어른이 되어 몸집이 커진 후에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가 쉽지 않을 테지. 접었을 때 천장에 딱 맞게 들어가는 접이식 계단은 너무 가파르고 불편했다. 부부가 사는 방 하나에 다락방 하나인 집. 어른들이 말하기를, 성주를 한 사람은 염라대왕도 그냥 통과시킨다고 했다. 집 짓는 일이 그만큼 힘들다는 말이겠지. 언제든 지금보다 넓은 땅에 자신의 집, 아니 가족의 집을 짓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남기고 싶었다. 생활은 시간과 함께 하릴없이 흘렀고, 새집을 짓는 일은 요원해졌고, 어느덧 여든이 넘어있었다. 조영감은 꼼짝없이 염라대왕 앞에서 공과에 대한 심판받을 일만 남았다.

 

조영감은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욕망하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얕은 신음을 뱉었다. 적어도 여든이 넘은 노인이라면 당연하게 삶에 대해 관조해야 하지 않을까, 젊었을 때부터 노인을 보며 생각했었다. 막상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여든이 넘어서 또 알았다. 마흔이 넘으면 고치기 힘들다, 조금이라도 젊었을 적에 삶의 공부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하는 말을 수도 없이 되뇌었고,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억지를 부리지 말라고 했던 돌아가신 친구 아버지의 유지를 자신이 품으며 살았지만 여전한 자신을 또 봤다. 조영감은 허투루 산 건가, 하는 생각에 화장실 거울 속 얼굴을 피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언제였을까. 이 집으로 이사를 한 것도 아득했다. 집 근처에 딸이 다니던 학교가 있었다. 학부모 중 일부는 학교 주변 마을에 집을 짓거나 사거나 세를 들어 살았다. 딸이 다닌 학교는 초중등 과정의 대안학교였다. 아이들 덕분에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삶에 대해 비슷한 생각-부모가 즐겁고 재밌게 살아야 아이가 행복하다는-을 가진 사람들이 학교 근동에 모여서 살며 어울렸다. 그때만 하더라도 꿈꾸는 일이 헛되지 않던 시기라 사람들은 꿈꾸는 일을 좋아했으며, 꿈에만 그치지 않고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그 꿈이라는 것이 말처럼 거창하지 않아서 그저 재밌으면 그걸로 됐다. 사람들은 꿈꾸는 동네, 꿈을 이고 사는 마을, 몽하리夢下里라 이름 짓고, 마을 소식지 <몽하리사람들>을 만들어 돌려 보기도 했다.

 

몽하리 사람들은 구실만 생기면 모여 이야기하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놀았다. 어쩌면 떠들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놀기 위해 구실을 만들었다. 누구네 집에 썬룸이나 사랑방용 온실을 지었거나, 퇴직을 하거나, 결혼 몇 주년이 되거나, 비가 오거나, 달이 밝거나 하는 구실로 모였다. 누군가가 35년 가까운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각자 술을 가져오고, 음식을 준비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퇴직보다는 새로운 출발을 축하했다.

 

조영감은 술을 마시지 못해서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부러웠다. 당나라 시인 이백이 노래하기를, 옛말에 술 석 잔이면 대도를 통하고, 술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고 했으며 술을 마셨으니 굳이 성인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몽하리 사람들은 백발이 성성한 지금도 술을 마시며 도를 깨치고, 자연과 하나 되기를 시도한다. 삶이 마감을 향해 발걸음을 뗄수록 필요한 공부지, 술을 입에 대지 못하는 조영감은 즐거운 술, 삶을 향한 공부로써 술은 늙음과 무관하구나, 생각했다. 공부에 끝이 없다고 했으니 당연한 일인가. 몽하리는 여전히 연태고량주 향기가 피어오른다.

 

세면대를 붙잡고 화장실 거울 보며 주춤할 때 아내가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왔다. 물에 젖은 발로 욕조를 넘어서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시간이 흐르면 쉽게 하던 일도 어려워지는 것이 몸이었다. 아예 옷을 벗고 여기 앉아요. 아내가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이 적당히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머리를 감기고 씻겨주었다. 아내는 조영감을 돌보는 일에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병원 생활을 몇 번이나 했지만 변함이 없었다. 몇 해 전 찬바람이 불 때 결혼한 지 50년이 되고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며 사진을 뒤적이다 딸아이 방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다가 떨어졌다. 아이 어릴 적 사진을 찾겠다는 조영감의 고집을 아내는 꺾지 않았고, 조영감은 얼굴과 몇 군데에 타박상을 입었으며 고관절을 다쳤다.

 

전용 파스를 붙이고, 최신 에어매트를 깔아도 욕창은 잦아들지를 몰랐다. 고관절을 다쳐 가야 할 곳을 가지 못하는 조영감처럼 조영감의 피는 제 갈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거나 찾더라도 도착해야 할 곳에 제 시각에 도착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 번 발생하자 잔디밭 토끼풀처럼 바싹 마른 몸 이곳저곳에 범람했다. 나 아니면 누가 하겠어요, 내가 이러면 당신은 그냥 있을 거 아니잖아요. 요양원에 들어가면 내가 거기 직원으로 취직을 할 테니 걱정 말아요, 하며 아내는 조영감을 뒤집고 돌려서 눕혔다. 속옷 대신에 입은 팬티형 기저귀가 뒤척일 때마다 서걱거렸다. 조영감은 무슨 말이든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앓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휠체어에 앉아 병원 옥상에 올랐다. 겨울은 늘 길었지만 봄은 왔다. 시간은 어김이 없어서 바람 끝이 향기로웠고, 병원 옥상 화단에 민들레가 샛노랬다. 조영감은 4차선 대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무리와 저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조영감도 저들 속에서 분주할 때가 있었다. 시간이 조영감에게도 어김이 없어서 조영감을 집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이제 더이상 자신에게 시간이 남았는지 자신할 수 없었다. 아직 바람이 차네, 들어가요, 하며 아내가 목도리를 여며줬다. 두 팔로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발바닥에 힘을 줬지만 시들고 마른 다리는 바르르 떨기만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아이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어린아이를 태운 휠체어를 밀면서 내렸다.

 

샤워를 끝내자 아내는 수건으로 조영감을 닦은 뒤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헤어 드라이기로 몸 구석구석을 덥혀주었다. 조영감은 살짝 오한을 느꼈고 거죽만 남은 몸에 소름이 일어났다. 깨끗하게 세탁된 하얀 내복을 입었다. 지난겨울 아내는 조영감이 입을 내복을 몇 벌 준비했다. 조영감이 언제 더럽혀질지 모르니 흰색보다 어두운 게 어떠냐고 했을 때 아내는 그럴수록 깨끗하게 입어야 한다고 했다. 아내가 내복 입는 걸 도왔다. 순면이어서 부드러웠고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하얀 내복은 아내가 감싸는 것처럼 포근했다. 조영감은 끙, 소리를 내며 침대에 누웠다. 당신도 쉬어요, 조영감이 그르렁대는 숨소리가 멈추자 말했고, 정리할 게 조금 남았어요, 아내가 이부자리를 살피면서 말했다. 아내는 이발 도구를 씻어서 정리하고, 샤워하던 자리를 치웠고, 조영감이 벗은 옷가지를 세탁기에 넣었다.

 

뭐 좀 드실래요? 배 안 고파요? 다시 돌아온 아내가 방문을 열고 물었지만 조영감은 손짓으로 괜찮다고 말했다. 요즘은 먹고 마시는 것도 일인 것처럼 생각이 없었다. 조영감은 끓어오르는 가래를 휴지에 뱉고 이불을 조금 더 당겼다. 아내가 겨울 이불을 걷어내고 꺼낸 봄 이불이었다. 봄 이불은 가볍고 부드럽고 몸에 감겨서 편안했다. 젊었을 때 허리를 수술하고 들였던 돌침대는 낮은 온도에도 따스했다. 이발을 하고 샤워를 해서 그런지 여느 날과 다른 낮잠을 잘 것 같아서 조영감은 편안한 앓는 소리를 냈다. 아내가 부엌에서 여전히 무언가를 하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낮잠은 부드럽지만 불규칙적인 조영감의 숨소리를 따라서 서서히 조영감을 찾아왔다.

 

우리 영감님, 아직도 주무셔요? 조영감이 평소보다 늦게까지 기척이 없자 아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조영감은 반듯하게 누워 턱밑까지 이불을 덮고 있었고,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일어나셔요, 하며 아내가 조영감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살짝 흔들었다. 조영감은 젊었을 적부터 사용하던 스마트 워치를 여전히 차고 있었다. 산소포화도와 심박수 같은 것이 수시로 몸 상태를 알려줬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조영감 팔목에 스마트 워치가 보였다. 스마트 워치 화면에 심장을 표시한 하트 모양은 검은색이었고, 심박수는 0이었다. 조영감은 평소보다 길고 긴 낮잠을 자고 있었다. 몽사_바람개비 <몽하리사람들>6호 202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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