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인가 나는 어젯밤에 당신 꿈을 꾸었어요,하며 꿈 이야기를 당신에게 말했어요. 당신은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만 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몇 모금 남지 않은 커피잔을 쥔 내 손등을 쓰다듬으며 꿈은 반대라고 하잖아요,라고 말했어요. 그 말을 할 때 당신 눈동자는 커피보다 진해 보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처럼 깊어 보였어요. 걱정 말아요, 꿈은 반대라니까,라고 다시 말하면서 당신이 환한 미소를 지을 때 나는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일어나는 걸 느꼈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래요, 꿈은 반대라니까,하며 조바심을 살며시 밀어 넣었어요. 짙은 안개에 휩싸여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어서 우두커니 서 있었어요. 그러다 불현듯 햇살이 내리쬐고 안개가 걷히고 사방이 환해졌지만 당신은 내 곁에 없었어요. 조금 전까지 내 손을 꼭 잡았던 당신 손도, 가느랗게 들리던 당신 숨소리도 없었어요. 당신은 안개와 함께 사라졌어요.
나는 후두둑 잠에서 깼지만 가만히 누운 채로 천장만 바라봤어요. 당신이 좋아해서 골랐던 은빛 꽃무늬 천장 도배지가 선명하게 보여서 아침인가 싶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깊은 밤이었어요. 내 곁에서 잠든 당신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어요. 나는 꿈인지 현실인지 몰라서 한참을 기다렸어요. 귓볼을 타고 눈물 몇 방울이 또르르 흘렀어요. 지금도 당신이 하던 말이 떠올라요. 걱정 말아요. 꿈은 반대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안녕을 말하지도 않고, 커피잔보다 더 따스한 당신 손을 내보이지도 않고, 당신은 떠났어요. 꿈은 반대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세상 끝까지 뜨거울 것 같던 여름날도 결국 서서히 밀려나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어요. 하루가 다르게 밤은 이르게 다가오고 아침은 더디게 찾아왔어요. 당신과 마주앉아 저녁을 먹을 때 당신은 엊그제만 해도 이 시간에 이렇게 어둡지 않았던 거 같은데... 가을이 오나봐요,라고 말했어요. 나는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길을 걷고 싶어요, 하며 당신에게 물잔을 건넸어요.
당신과 나는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섰어요. 산책을 할 때 나는 쓰레기 봉투를 들고, 당신은 분리수거용 쓰레기를 보듬고 나가기도 했어요. 분리수거장에서 이것저것을 나누며 우리가 언제 이런 걸 썼나, 하며 의아해 했지요. 우리는 저녁 산책을 매일 하다시피 했어요. 그때 당신과 나는 아, 정말 시간은 어김이 없네요, 계절이 바뀌나 봐요, 하며 동네 골목길에서, 차가 다니는 길가에서, 들고나는 밤바다 파도 소리에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걸 함께 바라봤어요. 밤하늘은 진하고 깊어졌고, 별은 더 빛나며 반짝였고, 밤바다는 별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였고, 풀벌레 소리는 더욱 맑아졌어요.
살며시 당신 손을 잡으며 걸을 때 나는 당신에게 말했어요. 너무 많이 사랑하면 안 될 거 같아요. 누군가 떠난다면, 남은 사람이 너무 힘들 거 같아요. 그러자 당신이 말했어요. 할 수 있는 사랑을 다해야지 않을까요? 그러면 남은 사람도 후회하지 않고,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때 나는 만약 내가 남는다면... 자신이 없어요,라는 말을 하지 못했어요.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 것도, 당신이 내 곁에 있지 않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요. 동네 어귀로 들어설 때 나는 겨우 그렇지만...하며 말끝을 흐렸고,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손을 꼭 쥐었어요. 어두운 풀섶 위로 반딧불이 몇 마리가 빛을 반짝이다가 이내 사라졌어요.
당신과 나는 붉은 낙엽이 수북한 가을 오솔길을, 하얀 눈이 소담하게 쌓인 눈길을 함께 걷지 못했어요. 계절이 바뀌어도 늘 변함없이 내 곁에 함께하던 많은 것이 당신과 함께 사라졌어요. 봄날 저녁 당신과 마주하던 밥상에서 끓던 달래와 냉이 된장국 내음도,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 선풍기 바람 앞에서 서로에게 부채질을 하던 날도, 화단에 흐드러진 샛노란 가을 국화와 높고 파란 하늘도, 찬바람에 언 손을 당신 코트주머니에 함께 넣을 때 전해오던 따뜻한 온기도 사라졌어요. 버릴 쓰레기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아서 쓰레기를 핑계로 산책을 나갈 일도 사라졌어요. 그리고 이제 나조차도 사라졌어요. 차라리 나은 일인지도 몰라요. 당신이 사라졌으니 나도 사라지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그때 당신에게 하지 못했던 말은 맞는 말이었나 봐요. 내가 남는다면... 자신이 없어요. 맞아요. 나는 자신이 없었고, 지금도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 나는 사라졌나 봐요. 당신이 떠난 자리에 나는 남았지만, 나는 더이상 남아있지 않고 사라졌어요. 당신은 그때 이미 알고 있었나요?
사람들은 말을 해요. 이별이든, 이혼이든, 죽음이든 헤어지는 일은 결코 슬프고 아픈 일만은 아니어서 이런 일을 다르게 보고, 새롭고 깊게 본다면 그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한송이 꽃으로 살 수 있다고 말이에요. 정말 그럴까요? 당신이 사라지고, 내가 사라진 자리에서 피어오르는 꽃 한송이를 나는 볼 수 있을까요? 당신과 내가 한송이 꽃처럼... 그 꽃이 당신이 좋아하던 천장 도배지에 새겨진 꽃이었으면 좋겠어요. 그 꽃을 좋아해서 나는 당신이 좋아요.
저녁이 되니 바람이 살랑거리네요. 가을이 오고 있어요. 가을 바람이 선선한 오늘밤 사람들이 모여요. 떠난 사람들, 사라진 사람들을 잘 떠나게, 잘 사라지게 하는 꽃을 피우려고 사람들이 모여요. 어쩌면 그 안에 당신이 있을지도 모르고, 내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당신과 나는 그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당신과 나는 그 꽃 한송이처럼 살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둘러앉아 당골의 말을 들어요. 당신은 알고 있겠지만, 당골은 무당을 부르는 우리네 말이라고 해요. 당골네는 여자 무당을 부르는 말이고요. 당신이 아이였을 때 이웃집에서 굿을 했던 이야기를 나에게 해준 적이 있어요. 그때 한복을 입고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칠한 당골네가 아이인 당신 손을 잡고 자기 집에 같이 가자고 했었다면서요. 아이였던 당신은 무서워서 큰소리로 할머니를 부르며 도망쳤다고 했고요. 우리 동네에서도 옛날에는 굿을 참 많이 했어요.
당골은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누군가 죽으면 가서 굿를 했고, 소나 돼지가 난산를 하면 가서 빌어주기도 했는데 소나 돼지가 거꾸로 나오면서도 건강하게 나왔다고 해요. 아이가 태어날 때도 거기에서 기도를 해줬다고 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군가 이승을 떠나면 당골은 밤을 새워서 어떨 때는 이틀, 사흘 동안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굿을 했다네요. 탁해진 영혼이 다른 곳으로 갈 때 맑은 몸으로 가서 다른 존재들과 온전히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의미였다고 해요. 이런 굿판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불을 밝히고, 술을 가져오고, 쌀을 가져오고, 돈도 가져오고, 되는 대로 가져와서 함께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췄어요. 그 영혼을 위해서, 또 사람들이 하늘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에요. 굿판은 말 그대로 축제였고 파티였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굿판을 멀리 했어요. 사람들은 무당에게 모든 걸 맡기고 선뜻 나서서 같이 축제를 즐기는 게 아닌 구경꾼으로 전락하게 되면서 축제의 불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좋은 일이 생기면 널리 알리려고 하지만, 안 좋은 일, 슬픈 일,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쉬쉬하며 알리려 하지 않게 되자 자연스레 굿판도 멀리하게 되었어요. 맞는 말인가 봐요. 당신이 사라지자 나도 스스로 사라졌으니 말이에요. 그렇지만 당골 말이 맞아요. 힘들고 슬프고 무언가 안 돼 보이는 일을 사람들이 함께 나누지 않고 과연 좋은 세상이 올까, 하는 말 말이에요. 하지만 나는 아직 나눌 힘이 없나 봐요.
당골이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아니, 나에게 한 말인지도 몰라요. 내가 전에 바닷가에서 굿을 하는데 비가 왔어요. 그래서 천막 안에서 둘러서서 밥을 먹었어요. 밥을 먹으면서 생각했어요. 이 영혼이 어디에서 와서 이렇게 밥을 먹고 있을까. 그리고 내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그때 우리 죽었지요? 그래서 이 안으로 밥 먹으로 온 거죠, 라고 말이에요. 그때 우리가 죽었었구나. 한날 한시에 죽었는지 아니면 워낙 옛날 일이고 죽으면 또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기억이 안 나지만. 왠지 이 밥이 이렇게 맛있고 이때에 이 밥 먹고 싶어서 이렇게 오는 거 보니까 죽어서 그런 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골 말이 맞아요. 당신과 나 그리고 여기 둘러앉은 우리, 그때 죽었어요. 그래서 이 자리에, 이렇게 둘러앉아 있나 봐요.
당골은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아니, 나에게 말했어요. 굿을 할 때 넋을 올리는 대목이 있어요. 사람 형상을 하고 있는 게 넋이라고 해요. 넋을 올리겠어요. 지전으로 넋을 올려요. 넋을 올리는 걸 의뢰하는 사람을 재가댁이라 하고, 넋을 올리는 사람은 당골이에요. 재가댁의 머리 위에 조상의 넋을 올려놓고 뭐라고 뭐라고 하면서 지전으로 들어 올리면 지전에 넋이 붙어서 쑥 올라와요. 그냥 신비롭죠. 신비롭기도 하지만 영혼이 가벼워져요. 정말 그지없이, 더 할 나위 없어진 상태가 돼요. 그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굿판이에요. 영혼이 맑아졌다라고 하면, 굿이 잘 됐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나는 당골의 말을 들었어요. 그리고 정성들여 지전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나는 넋을 들어 올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됐어요. 나는 사라졌는데, 당신이 사라질 때 나는 사라졌는데 나의 넋이, 나의 영혼이 가벼워질 수 있을까. 두려웠어요. 그래서 지전 만들기에 더욱 집중했어요. 온 힘을 기울여 조심스럽게 가위질을 했어요. 겹겹이 쌓인 하얀 종이가 풍성하게 부풀려서 옛날 옛적 엽전꾸러미 모양으로 변했어요.
지전 손잡이를 여미면서 당신을 생각했어요. 나를 생각했어요. 당신의 넋이 들어 올려져 아름다운 곳으로 향하길 바래요. 그곳이 어디든, 그곳에서 당신과 나의 넋이 가볍게, 한없이 가볍게 당신을 딛고, 나를 딛고 오르길 바래요. 오늘밤 둘러앉은 사람들은 지전을 만들어서 서로가 넋을 올려주는 사람이 될 거예요. 사람들은 당골이 되어서 저마다의 넋을 들어올릴 거예요. 사람들은 오늘밤 무당이 되어서 이웃의 아픔을 달래줄 거예요. 내 곁으로 온 당신과 함께 말이에요.
당신과 나를 이어주는 실을 늘어뜨리고, 공물을 올렸어요.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웠어요. 당신과 나는 서로 마주보며 세 번 절을 했어요. 그때가 생각났어요. 당신과 나는 백배 절명상을 했어요.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당신과 나의 삶이 흔들릴 때 우리는 함께 절을 했어요. 방안에 향이 피어오르고 하나의 움직임만이 있었어요. 그리고 고요한 침묵이 내렸어요. 당신과 나는 침묵 속에서 침잠했어요.
오늘밤 당신과 나는 절을 해요. 그리고 당골의 소리를 듣고, 춤을 추는 바리데기를 받아 들여요. 바리데기는 버려진 아이였지만 삶의 세상과 죽음의 세상을 넘나들고 죽어서 살아요. 바리데기는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안내자가 되어 삶과 죽음의 윤회를 돌보는 무조신巫祖神이 되었어요. 그래서 당골은 바리데기의 삶과 죽음을 노래하고 춤을 춰요. 당신과 나의 길에 바리데기가 함께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사람들은 지전으로 서로의 넋을 들어올리고, 지전을 꽃술처럼 흔들며 춤을 춰요. 사람들은 당골이 되고, 당골네가 되어서 노래하고 춤을 춰요. 당신과 나의 영혼은 맑아지고 가벼워져요. 당신과 나의 넋은 가벼이 들어 올려져서 멀리 날아가요. 당신과 나는 바리데기가 되어 삶과 죽음의 길을 따라서 춤을 추며 걸어요.
그 길이 붉은 낙엽이 깔린 가을날이 아니어도 좋아요.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눈길이 아니어도 좋아요. 당신과 나는 어디에서나 함께 걸어요. 바람이 불어 당신 볼을 쓰다듬고, 날리는 낙엽이 당신 머리카락에 내려 앉아요. 나는 지전을 더 세차게 흔들면서 더 자유롭게 춤을 춰요. 당신도 보고 있겠지요? 지전을 꽃술처럼 흔들며 춤을 출 때 당신과 내가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같은 모습 말이에요.
우리의 축제는 끝이 났어요. 당신과 나의 파티도 끝이 났어요.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마침내 시작을 하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일도 결국은 끝이 나요. 그리고 삶과 죽음의 길은 다시 이어져요. 우리는 함께 절을 하고, 내 안의 나를 대하듯 함께한 이를 따뜻하게 안아줘요.
사람들은 무속巫俗을 터부시하기도 하지만, 이는 다만 정성을 다하여 잔치를 벌이고 기쁨의 축제, 슬픔과 고통의 축제를 함께 나누는 일이에요. 사람들은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잔치를 마무리해요. 잔칫날 밤은 깊어가고 가을을 부르는 풀벌레 소리는 밤하늘에 울려퍼져요. 그때 나는 꿈은 반대라고 했던 당신을 원망했어요. 하지만 알 것 같아요. 꿈은 반대라고 했던 당신 말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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