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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몇 장

몽하리 사람들 경주 역사 기행

몽하리 소식지 <몽하리사람들> 창간준비1호가 나온 202012월 어느 날 송년회를 겸해서 소식지를 돌려봤다. 이 자리에서 누군가 여행이든 기행이든 몽하리 사람들이 함께 떠나자고 했고, 사람들은 좋아라, 했다. 기왕이면 역사 기행이면 좋겠다고 했고, 후마가 중심이 되어 준비하기로 했고, 20214월쯤을 목표로 했다. 그렇지만 여러 문제로 미뤄지다가 드디어 202210월 한글날 연휴에 23일 일정으로 경주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역사기행에 대해 생각하고 말이 나온 지 근 2년 만이었다.

 

언제나 여행은 설레는 일이다. 출발 전날 몽하리 사람들 카톡방이 시끌벅적했다. 오랜만에 여러 가족이 떠나는 여행이라 긴장된다고 했더니 후마가 맴 단디 잡수이소~, 했다. 누구는 숯을, 누구는 불판을, 또 누구는 캠핑용 의자며 텐트를 가져오겠다며 서로 준비물을 챙겼다. 그리고 누군가는 경주 관련 영화를 보는데 무척이나 흥미롭다고도 했고, 급기야 짐이 많아서 화물차를 배차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도 했다. 그래, 여행이니 바리바리 싸들고 떠나봅시다. 이번 여행에 동참하지 못한 나마스테는 나만 빼고 재밌게 놀다오기를 바란다고 했고, 어울이 경주 여행을 최고로 즐겁게 잘 다녀오라고 카톡으로 배웅을 했다.

 

 

 

 

상율네를 선발대로 우리는 경주로 향했다. 상율네는 연휴 전날 1차로 출발해서 부산 놀이공원에서 아이들이랑 놀고 다음 날 합류했다. 연휴 첫날 오전에 후마네, 이든네, 라떼네, 해랑네가 2차 출발했으며 우리집과 한결네 두 부부는 점심 이후에 3차로 출발했다. 역시 여행은 목적지로 가는 길이 설레고 신난다.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소식을 전하느라 카톡이 바쁘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쉬면서 맛난 거 먹는 풍경, 불국사 주차장에서 만나자, 차가 밀린다, 우리는 몇 시쯤 도착할 거 같다는 등 여러 상황이 속속 전해졌다. 늦게 출발한 우리는 숙소로 방향을 잡으니 여유가 있었다. 아쉽지만 첫날 일정은 전해 듣기로 했다. 부산을 스쳐서 양산을 지나 경주가 가까워지니 불국사 여러 곳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올라왔다.

 

우리는 경주에서 숙소인 감포로 가는 옛길, 국도를 통과해서 호젓한 가을날 드라이브를 즐기려고 했지만, 시장을 봐달라는 빛나는 말에 그럼 얼렁 새 길로 갑시다, 하고 옛길을 포기했다. 하지만 가을은 옛길이든 새 길이든 가리지 않고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차창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은 높고 푸르고, 경주를 둘러싼 산은 가을 빛깔로 변하는 중이었다. 토함산 자락을 관통하는 긴 터널을 지나자 금방 동쪽 바다가 보일 것 같았지만 쉽사리 바다를 내주지 않는 풍경을 달려 감포에 도착했다.

 

우리 숙소에 도착,이라는 톡을 올리기 무섭게 상율, 이든, 도율, 나율, 관율이가 줄줄이 뛰어 들어왔다. 집을 떠나 멀리 낯선 동네에서 친구들을 만날 때 반가움은 몇 곱절이 된다. 아이들도 반가운지 달려와서 하나, 둘 품에 안겼고, 곧이어 어른들이 들어왔다. 낯선 곳에서 첫날 숙소에 도착해 짐을 푸는 일은 설레고 분주하다. 식구들이 많으니 잠자리를 나눠야 하고, 늦은 저녁도 준비해야 하고, 낮에 보고 듣고 겪은 일을 무용담으로 풀기도 해야 하니 어른들은 왁자지껄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오늘은 관율이 생일이다.

 

 

 

 

, 진짜 잘한다니까요. 옆에서 구경하던 관광객들도 웃고 난리였당께요. 후마가 불국사에서 해박한 역사 지식과 재치있는 입담으로 좌중을 쥐락펴락했는지 참석하지 않은 우리도 알 수 있었다. 다음에는 백제 쪽으로 갑시다. 누군가 끝나지도 않은 이번 역사기행 다음을 이야기할 정도였다. 우리는 저녁을 준비했고, 관율이 생일을 축하했다. 관율이는 생일을 거나하게 지낸다. 언젠가 관율이 생일 때도 몽하리 소식지 나눔 모임과 겹쳐서 많은 몽하리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오늘도 사람이 많아선지 관율이 표정이 상기됐다. 몽하리 마스코트 중 하나인 관율이가 건강하고 잘 크기를 바라며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숙소 앞마당 데크에서 작은 화로에 불을 피워서 경주의 밤을 밝히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화로를 놓은 테이블 상판이 화로의 열기에 녹았다. 다음 날 주인아주머니가 청소하다가 발견해서 빛나는에게, 자기는 괜찮은데 우리 아저씨가 뭐라고 했다며 난감해했다고 한다. 코스모스가 가득 핀 황룡사 터를 걸으며 그 얘길 하는 빛나는도, 듣는 우리도 뭘, 그 정도로 그럴까 싶었지만, 상대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 얘길 들은 상율아빠가 빛나는에게, 오늘 자재상이 문을 열었을라나, 하며 자재만 있으면 별거 아닌데, 라고 했다며 빛나는이 웃었다. 몽하리 맥가이버는 경주에서도 맥가이버였다. 얼만 간 변상을 하는 걸로 마무리 지었다.

 

경주 감포 바닷가 마을에서 화로에 불을 피우며 우리는 워매 겁나 추운데, 하며 장작을 더 넣었다. 불가에서 춥다, 춥다, 하는 걸 본 이든아빠가 다음 날 퇴근을 하고 들른 길에 겨울 점퍼를 박스로 가져왔다. 지난겨울 회사에서 지급된 출퇴근용 점퍼 남은 게 생각나서 가져왔다고 했다. 가볍고 따뜻해서 몽하리 사람들이 유니폼으로 입자고 했고, 좋다, 좋다를 연발했고, 배움지기에게도 갖다주기로 했다.

 

 

 

 

 

 

 

 

 

 

캠핑용 화로에서 장작불 열기가 테이블을 살살 녹이는 줄도 모르고 우린 불가에 둘러앉아 떠들었고, 어둠은 짙어졌다. 사람들은 다음엔 백제권으로 가자거나, 불국사에서 후마의 활약상을 이야기하거나, 내일 일정을 뒤섞어서 재잘댔다. 그러다가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밤에 봐야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말에 혹한 몇몇이 가자, 고 했다. 나와 은하수, 라떼, 댕댕이, 나무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으로 향했다.

 

깊은 밤 너른 감은사 터에 국보인 동탑과 서탑 두 기가 조명을 받으며 나란히 서 있었다. 사진 동호회 사람들이 모여서 탑과 한복을 입은 여인을 배경으로 장노출 사진을 연출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피사체로 단장을 한 여인과 피사체를 향해 카메라를 겨눈 많은 사진사를 구경하고,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탑돌이를 했다. 그리고 감은사 터 앞쪽 바다에 안장된 문무대왕의 기운이 바닷물을 타고 감은사 터로 휘감고 돌아 나간다는 수로를 건너서 감은사 터를 돌아다녔다. 1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다녀갔고, 얼마나 많은 일이 여기에서 일어났을까. 까마득한 시간의 숫자만큼, 그 이상 아득한 일이어서 상상할 수 없었다. 밤하늘 별과 같은 시간의 더께 위에 우리는 다만, 한순간 내뱉은 뒤 사라지는 숨이라도 될까. 긴 세월 서로를 의지했을 두 탑은 우리가 찾은 이 밤에도 각자 자리에서 묵묵히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향해 서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고즈넉한 감은사 터를 나와 문무대왕릉을 찾아 바다로 갔다. 알고 보니 지척이었는데 수년 전 기억을 더듬느라 살짝 헤매다가 대왕릉을 품은 바다 앞에 섰다. 첫째 날 우리는 해가 저물 무렵 경주 감포 바닷가를 산책하며 알았다. 동쪽 바다는 몽하리 남쪽 바다와 너무나도 다른 것을. 우리네 바다는 여수의 섬과 고흥반도에 둘러싸여 때로 호수가 되고, 때로 너른 뻘밭은 대지가 되었다면, 동쪽 바다는 마침내 바다였다. 거친 바람과 함께 먼바다를 달려온 거대한 파도는 거침없이 육지로 달려들어 크게 날숨을 토해냈고, 들숨으로 길게 사그라들었다. 우리는 동그라미가 와온 바다를 보며 호수 같은데, 했다는 말을 비로소 믿었다. 동쪽 바다는 육중하고 거대했고, 몽하리 와온 바다는 소박하고 단아했다.

 

우리는 밤바다에 다가갔다. 달빛을 받아 부서지는 포말이 반짝거렸고, 사위는 대낮 같았다. 헤엄치면 갈 수 있을 만한 거리에 대왕을 품은 바위 무더기로 파도가 넘실대고 있었다. 대왕은 살아서 바다를 건너온 왜구에 맞섰고, 죽어서 먼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서고 있었다. 크고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자 대왕을 옹위하던 일군의 장졸이 파도에 올라탔다. 마치 군마를 부리듯 파도를 탄 장졸 행렬은 감은사까지 군세를 밀고 올라가 휘돌아 동쪽 바다로 나왔다. 장졸은 대왕의 본진에 복귀하여 장궤를 하고, 다시 대왕을 옹위했다. 우리는 셋째 날 경주시내 대릉원에서 능이며, 총이며 하는 무덤에 붙은 이름에 대해서 후마에게 배웠다. 능은 그 주인이 왕일 때, 총은 그 주인은 알 수 없으나 유물이 출토되었을 때 붙인다고 했다. 문무대왕릉은 능이었다. 그곳에 문무대왕이 있었다.

 

대왕을 대왕으로 옹립하는 자는 우리만이 아니었다. 동쪽 밤바다의 수호자를 향해 무수히 많은 자가 촛불을 밝혔고, 칼을 휘두르며 춤을 추었고, 징을 울렸고, 북을 쳤고, 머리를 조아렸고, 두 손을 모았다. 대왕의 기세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려는 자가 대왕의 바다 앞에 있었다. 이것은 경외로울 만한 일이었으나 우리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들의 간절함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육중한 동쪽 바다와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는 차라리 두려웠다. 죽은 문무대왕은 죽은 장졸과 살아서 시립하는 자들과 함께 먼바다에 맞서고 있었다. 멀리 고기잡이배에서 밝히는 불빛이 밤의 수평선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자동차와 사람이 가득 찬 경주 시내에서 우리는 둘째 날을 보냈다. 근무가 없었는지 망태가 왔다. 점심 먹기도 힘들었고, 주차하기는 더 힘들었다. 우리는 원효대사가 공부했다는 분황사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고, 벽돌로 만든 탑을 봤고, 우물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고, 옹기종기 모인 돌탑더미에 우리가 만든 돌탑을 추가했다. 우리는 후마의 말에 귀를 쫑긋했고, 어김없이 다른 관광객도 가세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없이 넓은 황룡사 터를 뒤덮은 코스모스 사이를 가로질렀다. 아이들은 황룡사박물관에 들어가서 축소 복원한 목탑을 구경했고, 어른들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 입구 기념품 가게를 어슬렁거렸다.

 

 

 

 

 

 

 

 

 

 

 

 

 

 

 

 

 

 

 

 

 

 

 

 

 

 

 

너른 터는 신라의 신시가지였다고 하니 그 중심에 서 있었을 거대한 구층목탑은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현재 기술로도 목재를 써서 그때 그 탑을 복원하기가 어렵다고 하니 옛사람의 불국에 대한 염원과 정성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되돌린 일이 가능한 것인가, 가늠하려다 말았다. 우리는 주춧돌만 남은 너른 터에서 돌과 돌 사이를 뛰어넘거나 앉아서 쉬었고, 코스모스를 바라봤다. 코스모스가 천년을 넘은 시간의 개수와 그 시간의 흐름을 탔던 사람들만큼 많아서 바람에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았다. 대릉원이며, 첨성대며, 박물관이며, 삼릉숲 소나무 속에서 우리는 걸었다. 산 사람이 많았고, 죽은 자가 많았고, 그걸 지켜보는 소나무도 많았다.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그들을 에워싼 소나무 숲을 걸었고, 사진을 찍었고, 소나무 끝에 가닿을 수도 없는 하나마나 한 촌평을 했고, 때로는 침묵했다.

 

 

 

 

 

 

 

 

 

 

 

 

 

 

 

 

 

 

 

 

 

 

 

 

 

 

 

 

 

 

 

 

 

 

 

 

 

 

 

 

 

 

 

 

 

 

 

 

 

 

 

 

 

 

 

둘째 날 밤은 온종일 경주 시내를 돌아다닌 탓인지 술이 몇 순배 돌지 않고 잠들었다. 망태의 전매특허인 어묵탕이 진했고, 이든아빠가 공수한 겨울 점퍼에 다들 즐거워했다. 개인 텐트를 준비한 후마는 야외취침을 했다. 첫째 날 차에서 잠을 잔 상율아빠는 어느 구석을 찾아서 둘째 날 밤을 보냈을까. 마지막 날 아침에 우리는 나무가 내린 커피를 마셨고, 밥을 먹었다. 평소에 먹지 않던 아침밥도 집을 나오니 잘 들어갔다.

 

아버지 생신이었던 이든엄마와 친정이 가까운 동그라미네가 시간이 빠듯해서 우리는 마지막 날 일정을 축소했다. 대신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복귀하기로 했고, 동쪽 바다와 동쪽 육지 끝자락이 함께 그린 그림을 보기로 했다. 주상절리는 우뚝 솟거나 바다에 누워서 동그랗게 펼쳐져 있었다. 이 땅이 생길 때는 언제일까. 주상절리는 알고 있겠지만 그의 말은 들리지 않았고, 우리도 물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만 바라봤다. 마지막 날 동쪽 바다는 고요했다. 동쪽 바다는 따뜻한 태양을 품어 반짝거렸고, 오가는 고깃배를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리는 몽하리로 돌아왔다. 먼 길을 달려서 더 먼 시간으로 갔고, 다시 먼 길을 달려서 지금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몽하리 바다는, 몽하리 사람들은 몽하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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