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봐서 머헐 것이냐. 송아지 둠벙 쳐다보기당께.
그때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더라면 뭐가 달라져도 달라졌을까.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니 알 수 없는 일이며, 알 수 없는 일은 알 수 없는 대로 가만히 흘러간다. 다만, 기어코 알아야겠다며 악다구니를 쓰니 상처로 시작해서 분노 속에서 헤매다가 고통에 매여 사는 일이 어디 이것뿐일까. 그가 할머니 말을 되새긴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는 때때로 할머니 음성을 들었지만 한동안 잊고 있었다. 아이, 머시기야. 냅둬불어라. 그것이 송아지 둠벙 쳐다보기당께 자꼬 그랬싼다이. 그럴 때마다 그는 그래, 송아지가 둠벙을 쳐다보며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수면 아래 붕어를 잡을 수 있을까, 우렁이를 건질 수 있을까, 그저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만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뿐이지, 했다. 알 수 없는 일은 알려고 하지 말고,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이 흐르는 대로 두면 되는 일이겠지. 그렇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을 얽어매는 고통의 끈이란 사실을 지울 수는 없었다.
할머니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가 언제였을까. 고3 여름방학이 끝났던가, 방학 중이었던가 여전히 희미했다. 그때는 방학 중에도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했었으니까. 교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 거의 다 도착해서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손차양으로 햇빛을 가렸던 걸로 봐서 햇살이 따가웠던 모양이었다. 신호가 바뀌고 횡단보도 한가운데에서 자전거를 끌고 길을 건너던 친구 S를 만났다. 야이, 새끼야. 학교 안 가고 어디 가냐? 그때나 오십이 넘은 지금이나 친구를 만나면 욕지거리부터 하는 건 변하지 않는 고향의 인사법이다. 초중고를 같이 다녔고 대학 땐 하숙방에서, 자취방에서 함께 술 먹고 토하고 놀았으니까. 그냥, 바다 구경이나 할라고... 미친 새끼.
그는 S에게 미쳤다는 말을 들으며 붙잡혀서 카페로 갔다. 터미널 옆 카페는 그들의 아지트였다. 칸막이가 쳐진 카페는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S가 내뱉는 이야기는 그에게로 와서 두서없이 헝클어졌다. 그는 듣기만 했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알지 못 하는 내용이었으니 대꾸할 말도 없었고 잠자코 들었다. 어쩌면 사춘기적 상상이 현실에서 펼쳐지는 것에 대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현실인지 꿈인지 모호했고, 긴장이 밀려와 손끝이 파닥거렸다. 그는 S가 손가락에 끼고 있던 담배를 슬그머니 빼내서 입에 물었다. 처음인데도 걸림이 없었고, 온몸을 감싼 후 스르르 내려갔다.
S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S의 할머니와 그의 할머니는 손주 손을 잡고 함께 국민학교에 입학을 할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 S는 자신의 할머니로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다. S는 그도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고 그 일로 그가 방황하느라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그의 할머니는 그가 두 살 때 손주를 버리고 간 며느리를 대신해 지금껏 그를 키웠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 할머니에게서 저간의 사정을 들었고, 그 말도 들었다. 언제 말해도 해야제 했는디... 인자사 만나서 머헐 것이냐. 송아지 둠벙 쳐다보기제.
그는 오늘 다른 날에 비해서 일찍 귀가해서 아내와 이른 저녁을 먹었다. 아내는 연신 코를 훌쩍거렸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비염이 심해졌다. 계절이 바뀌는 탓인 모양이었다.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일교차가 커지면서 비염이 도지기 시작했고, 어제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병원에 다녀오고 약을 먹었다. 그는 아내에게 오늘은 집에서 쉬지 그래, 했고 아내는 그럴까, 하면서 휴지에 코를 풀었다. 하지만 그가 가방을 챙겨서 현관을 나서자 아내는 나도 갈래, 하며 따라 나섰다. 그의 아내는 그분의 유튜브를 자주 봤고, 이런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것이며, 초대한 사람에게 고마워서라도 가겠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아이들이 유튜브에 매몰되었다며 걱정하기도 하지만, 그는 유튜브가 장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국내외의 예술 공연이며 마음공부, 지식공부를 시시때때로 접할 수 있으니 선한 영향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현관문을 나서다가 아내의 스카프를 여미며 마스크라도 꼭 쓰고 있어, 했다.
시내 구도심으로 가는 길은 그가 사는 지방정부에서 주최하는 큰 행사가 다가오면서 복잡해졌다. 예전에는 강변을 따라 곧장 올라가면 구시내로 갈 수 있었지만, 행사로 1년 남짓 강변 길이 막히게 되어 에둘러서 시내 곳곳을 통과해야만 했다.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많았다. 서둘렀지만 그가 도착하자마자 이야기 마당이 막 시작되었다. 그와 아내는 뒷자리에 앉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했다. 사랑어린배움터 식구들이 대부분이었고, 시내에서 왔는지 낯선 얼굴도 몇이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자리에 앉아 함께한 사람들과 마음을 모았다. 마음을 모으는 시간은 자신이 있는 자리에 자기 마음도 있게 하고, 자신이 있는 곳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마음모으기는 사랑어린배움터에서 모임이나 일을 시작하고 끝낼 때에 하는 오래된 공부 방법이었다. 그는 스스로 혹은 가족이 모일 때에 스스럼없이 마음을 모으며 자기가 있는 곳에 자기 자신을 두려고 애를 썼다. 마음을 모으는 시작과 끝을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호흡을 가다듬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 맴돌다가 사그라들었다. 오늘 이야기 마당은 관옥나무도서관에서 진행한 사람과 세상을 잇고, 자기 자신과 마을, 자연을 이어서 저마다 자기 길을 찾도록 돕는 <잇다>의 첫 번째 마당이었으며, 이야기 스승은 조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자기 속을 끓이면서 보내고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보냈던 젊은 날들, 쓸데없는 데 마음을 끓이고 갈등하면서 다른 사람들하고만 갈등이 아니고 자신과의 불화 때문에 갈등하면서 살아온 삶 때문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탕진했던 아쉬움을 이야기했다. 물론, 그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 이 시간이 있다고 했다. 선생님은 어린 시절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일이, 내일이라도 죽을 것 같았던 고통의 기억이 있었지만, 하늘은 무너지지 않았으며 죽지 않고 여전히 잘 살고 있다는 말에 그는 자신도 지금까지 잘 살고 있음에 안도했다.
기억은 주관적이고 선별적이어서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든 유리하게 남아 있으며 점차 스스로에게 각인이 되어 자신을 옥죄는 일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또한 삶은 대체적으로 단순해서 별일이 아닌데도 각인된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상처는 어릴 적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그때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산다는 것이었다. 상처보다는 잘 해줬던 일이 훨씬 많았을 텐데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상처만 기억하며 그것에 얽매인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처, 트라우마는 객관성이 없어서 타인이 보면 전혀 합리적이지도 않다고 했다. 또한 부모-대체적으로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는다-도 사람이어서 실수할 수도 있으며 완전하지 못하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불완전하면서 타인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모순을 갖고 있으며 자기 자신의 불완전을 인정하듯 타인의 불완전함도 인정해야 한다고 했으며, 그래서 인간의 욕구는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갈등하고 번민하느라 끊임없는 욕구 불만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욕구는 상당 부분 근거가 없으니 욕구 불만에서 벗어나야만 한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릴 적 상처를 받았을 때의 내가 아님을 자각해야 자신이 성장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단지 많은 기억 중 하나일 뿐이며, 나는 이만큼 성장했다는 걸 스스로 깨달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으며, 시선을 나에게로 돌려 문제 해결도 자신 안에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못하고 고통 속에 얽매이는 것은 인간의 고귀한 영성에 대한 배신일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니 스스로 내 문제는 내 안에 있으니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내공,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이 어떻게 해주기만을 바라는, 자기 삶을 타인에게 맡기는 것과 같으며, 이것은 사이비 교주에게 자신의 메시아가 되어 달라고 기대거나 운동으로 뱃살을 빼지 못하고 병원을 찾는 사람과 같다고 했다.
그것-상처 받은 기억-은 이미 다 지나간 일이며 삶을 지배하는 것은 생각과 감정이다. 생각에 빠지면 감정적으로 증폭이 되어 자신을 얽어매게 한다. 그러니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감정을 건너야 한다.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슬프면 슬퍼하되 그것에 깊숙히 빠지지 않고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통통 건너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당연한 모습이며, 생각과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 고차원적인 인간이라 오해하기 쉬운데 이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생각과 감정이 없다면 그것은 미라에 불과한 것이며 다만, 거기에 계속 빠지지 않고 경쾌하게 생각과 감정을 건널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할머니의 음성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인자 와서 머헐 것이냐, 송아지 둠벙 쳐다보기당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도 아니고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이었으며 자신이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흐르는 대로 흘러가면 될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는 삶의 단순성과 개별성에 대해, 기억의 주관성과 선별적 편향성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왜 나인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는 없었다. 그 자신에게 펼쳐진 일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일이었다면, 그는 그 누군가에게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누군가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며 그는 멀찌감치 물러서서 어릴 적 자신을 보고 있다면 어떤 마음일까, 하고 생각했다. 아이야, 이렇게 한발짝 물러서서 바라본다면 삶은 별일 아닌 단순한 일의 연속이란다. 아이야, 니 잘못이 아니야. 너무 슬퍼하지 말고, 일어나렴. 그는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스스로에게 헛웃음이 났다. 그는 그와 어린 그의 그림을 그려놓고 보니 부질없고, 하등 쓸데없는 짓이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걸 금방 알았고, 이런 자신을 누가 알까 낯부끄러웠다. 그는 그래서 삶을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는 모양이구나, 지금 나는 비극에 출연 중인가, 희극에 출연 중인가,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웃었다. 그까짓 게 뭐라고,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선생님의 친구이며 일반계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께서 지난 3월 이후 학교의 변화에 대해 들려줬다. 교장 선생님은 교생실습부터 교장이 되기까지 35년을 한 학교에서 교단에 섰다고 했으며, 자신이 3월부터 교장이 된 이래로 학교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학생이 주도하는 입학식, 아침 등교 시간에 바른생활부-선도부-의 단속보다는 교장이 반갑게 맞이하기, 학교에서 휴대폰 사용, 방과 후 보충수업의 자율적 참여 등에 관해서 학생 스스로 결정권을 갖게 했더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했다. 학교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아이들이 결정하게 하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지켜진다고 했다. 사람들은 대개 관행적으로 해오던 일에 대해 변화를 두려워하나 다르게 생각하고 결정하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다고 했다. 입담이 좋은 교장 선생님은 학교 현장에서 있었던 많은 일을 예로 들며 재미있게 말씀을 하셨다. 사랑어린배움터 식구들이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는 그날 자율학습을 빼먹고 교문 앞에서 발길을 돌린 후 월요일 조회 때 봉걸레 막대기가 부러질 때까지 맞았고, 어느 날인가 야간 자율학습을 빼먹고 격투기를 배우러 갔던 그의 친구는 중앙 계단에서 복도 끝까지 왕복으로 담임에게 맨손으로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이런 기억도 어쩌면 주관적이고 편향적이겠구나, 그때 그 선생은 그게 최선이었을 테지, 아니지, 폭력 문제는 다른 문젠가, 문득 생각하다가 사람들을 따라서 웃었다.
선생님의 이야기가 끝나고 사람들은 선생님에게 품었던 질문을 했다. 친구의 아이가 힘들어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남 탓을 하지 않고 스스로 내 탓이라고 하다 보면 자괴감, 자기 좌절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탓만 하는 것이 적절한지, 평생을 따라다니는 생각과 감정을 소중하게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기 길을 찾아 가려는 청소년을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선생님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휴심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그는 그 질문이 자신에게 던져진 것처럼 가만히 귀 기울여 들었다.
그의 아이는 올해 먼 도시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기 길을 찾으려고 한다. 그의 아이는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스스로를 탓했고 자기에게 실망했고 때로 좌절하는 마음을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할 때 토로했다. 멀리서 혼자 사는 아이가 안쓰러워서 그는 아이와 자주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쉽사리 아이 전화번호를 누를 수 없었다. 그는 아이와 자신을 겹쳐서 그렸고, 그는 아이 모습이 그의 모습으로 바뀌는 걸 봤다. 그는 자신의 유전자가 아이에게 옮겨 가서 저렇게 힘들어 하는 구나, 하는 자괴감에 빠져들곤 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조종한 후 아이의 생각과 감정에 스며들어 좌절로 이어졌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선생님이 질문에 답을 할 때 사람들은 크게 웃었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후진국에 살고, 젊은 세대는 중진국에 살고, 우리 아이들은 선진국에 산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한 공간에 살지만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산다. 부모들은 말이 먹히지 않을까 봐서 아이들을 이해하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 뭔가가 올라온단 말이에요. 친구도 아이 탓으로만 여겼을 가능성이 큰데, 누구나 자기 삶을 돌아보고 욕구를 돌아보면, 친구 자신도 편해지고 아이도 조금씩 변화하지 않을까. 아이도 그렇고 친구가 고통스럽겠지만, 변화의 출발선에서 자신이 먼저 변화를 위한 출발을 해야 하고, 깨어나야 해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인간의 욕구와 그에 미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욕구불만이 있겠지만, 너무 갈등하고 고통 속에서 세월을 보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친구도 꼭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빨리 깨닫고, 결국 본인 문제고 부모라고 해도 아이를 어떻게 할 수도 없고요.
자기 탓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제대로 안 되고 안 풀리니까 욕구 불만 상태로 자기를 대상 삼아서 괴롭히는 거예요. 그렇게 안 해도 돼, 그정도면 괜찮아, 이렇게 조금 포기하고 놔주고 좀 쉬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되어야 다른 사람을 평안하게 대할 수 있죠.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똑같이 자유롭게 봐줘야 될 불쌍한 존재일 뿐이죠. 그러니 잘 돌봐줘야 해요. 남 탓을 하든지 자기를 탓하든지 자기 성에 차지 않고, 욕구 불만에서 오는 거니 잘 돌봐줘야죠.
우리는 생각이나 감정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은데 징검다리를 건너듯 경쾌하게 (생각과 감정을 넘어)가면 좋은데, 어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면 경쾌하게 그 생각과 감정에서 쉽게 못 벗어나요. 이건 결국 자기가 가졌던 어떤 기억과 경험, 상처와 트라우마로 인한 신념에서 비롯된 거예요. 어렸을 때 좋지 않은 피해를 당하고 그게 깊게 각인이 됐다면, 인간이라면 자신을 해치려는 존재로 인식하고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게 돼요. 객관적으로 보면 그런 걸 가지고 평생 그렇게 사나 하지만, 자신에게 암덩어리가 있으면 외과수술을 하듯이 심리적 수술을 해야 해요. 심리 상담이나 사랑어린배움터에서 하는 마음 공부나 저하고 같이 나찾사를 할 수도 있는데, 결국 그걸 가지고 깊게, 자기의 그런 것이 어디서부터 형성이 됐는지, 자기를 깊게 탐구해서 그런 기억과 트라우마가 어떻게 해서 됐는지 들여다 봐야 해요.
그때로 돌아가서 상처받은 마음을 깊게 들어주고 경청해주고 공감해주고, 자기 자신에게도 공감해주고, 옆에 사람도 도와주면서 공감해줄 때 40년, 50년 얼어 붙었던 마음이. (풀어져요) 우리가 봤을 때는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50년 동안 죽겠다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근거도 없는데 저는 죽겠다고 그러는데... 깊게 공감주고 깊게 경청해주고 깊게 쓰담쓰담해줘서 그 암덩어리를, 50년 동안 얼어 붙었던 것을 녹여줘야 돼요 해동을 시켜줘야해요
이렇게 얼어붙었던 마음을 회복시켜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너무 간단한 것이지만, 그렇게까지 살 것이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달으면 돼요. 그런 것을 갖고 50년 동안 끙끙대고 앞으로 100살까지 산다는데, 100살까지 또 그걸 가지고 가다 보면, 버리기 아깝다고 절대 해동되면 안 된다고 그게 금덩인 줄 알고... 그게 금덩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바로 벗어나면 되는데... 그냥 못 벗어나면 암덩어리라고 괴롭다면 할 수 없어요. 자기 스스로도 그걸 깊게 들여다보고 깊게 쓰담쓰담해주고 경청해주고 공감해줘야 자기가 늘 빠져버리는 그 감정으로부터 해탈이 되는 거죠. 해방이 되는 자유를 얻는 거죠.
(우리 아이들이)자기 욕구대로 (세상이)안 된다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것을, 그러니 자기 욕구를 잘 조절하는 것을 우리가 배워가는 것이 자기 성장이고, 자기 성질대로 자기 욕구대로 안 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고 또 이치적으로, 저희 아버지가 너무 자상하신 분이고 좋으신 분이었는데, 갑자기 어느 날 50대 때 싹 쓰러지더니 그날 뇌진탕으로 돌아가셔버렸어요. 어렸을 때 교회에 열심히 다녔는데도 뭔가가 납득이 돼야 하는데 납득이 안 되니까 분노가 폭발하고, 더욱더 분노가 폭발이 됐는데요. (지나고 보니)꼭 자기가 납득하고 싶은 욕구도, 납득 돼야하는 것도 없더라고요. 세상에 납득 안 되는 게 한두 가지예요? 한두 가지가 아니고 대부분이 납득이 안 되죠.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엿같은지 납득이 안 되는 게 많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바람대로 꼭 돼야 된다는 거, 꼭 abc로 딱딱 아귀가 맞아야 된다는 거... 아귀가 안 맞아요. 그리고 자기 꼬라지, 자기 성질 부린 대로 아귀가 맞으면 이 세상이 이상해져버려요. 먼저 자기 욕구를 자기 스스로 다스려져야지 그랬을 때 공자님 정도,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정도 됐을 때 그 욕구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세상이 괜찮아지지. 이 정도 수준에서, 이 사람 수준에서 자기 욕구대로 세상이 돼야 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개판이 되겠어요? 자기 욕구대로 세상은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어리지만 받아들여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휴심정은 저 스스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데요, 휴심정은 마음을 쉰다는 뜻인데, 마음을 쉰다는 것은 욕구를 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미이라가 된다는 것은 아니에요. 생각, 감정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욕구의 종류가 달라지는 것이지, 옛날 식으로 저를 죽이고 남을 죽이는 욕구가 아니고, 저도 욕구 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저도 욕심꾸러기예요. (욕구의)종류가 달라지고, 방향이 달라지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마음을 쉬고 욕구를 쉬니까 저도 삶이 훨씬 더 편안해지고 무엇보다도 제가 평안해져서 아, 이런 것을 많은 사람들이 다 경험하고 체험하면 좋겠다, 이게 대단한 명상 체험이라기 보다는 지금 당장 여기서 깨어나면, 자기의 계속 끓어오르는 그런 욕구대로 막 헤집고 투사하면서 사는 삶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나 결코 유익하지 않고 평화롭지 않고 해피하지 않았다면, 당장 그것을 내려놔도 절대 안 죽는다. 내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걸 내려놓는다고 해서 절대 무일푼 거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고, 훨씬 더 깊어지고, 더 환희에 차게 되고, 훨씬 더 희망이 샘솟을 수 있다는 것이에요. 이런 식으로 (그런)마음을 내려놔도, 욕구를 내려놔도 절대 지구는 꺼지지 않고, 내가 죽는 것도 아니니 안심하고 이 방향으로 갈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어느덧 열시가 가까워졌다.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하고 박수를 치면서 자리를 파했다. 이른 봄날의 밤은 차가웠다. 낮에는 벌써 여름인가 싶다가도 아침저녁으로는 여전히 겨울인가 하는 날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뉴스에서는 몇 년만에 오는 이상기후라는 기사를 냈다. 운동장 한쪽 놀이터에서 엄마 아빠를 따라온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이곳 초등학교에 와본 게 언제였을까. 국민학교 6학년 때였을까. 자전거를 타고 시골학교에서 여기까지 학교대항축구대회에 응원을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살던 시와 인근 군 소재 국민학교가 모두 참가했던 큰 대회였다. 처음 왔던 여기 시내 학교는 그가 다니던 시골 학교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컸었고, 축구를 구경하던 사람도 어른, 아이 할 것없이 운동장에 가득 했었고, 응원 소리는 우렁찼었다. 시내에 나가면 촌놈이라며 놀리고 돈 뺏긴다고 조심하라던 친구 말이 떠올라 움츠러들었었고, 혹시라도 자전거를 뺏길까 핸들을 꽉 잡고 멀찍이서 축구를 구경했었다.
까까머리에 시커멓던 아이가 오십 대가 되었을 만큼 시간이 흐른 지금, 학교는 작아졌고 구시내에 위치한 학교답게 학생수는 대폭 줄었다. 거대한 학교가 작아져서 소박해 보였다. 오늘 강의를 했던 교사는 새롭게 리모델링을 했고, 학교와는 경계를 둬서 더 이상 학교 교실이 아니었다. 이제는 이렇게 늦은 시각에 아이들이 놀지 않을 것 같은 학교에 울려 퍼진 사랑어린배움터 아이들 소리가 생경하게 들렸다. 40여년 전에 움츠러들었던 아이가 친구들이랑 소리치며 뛰어 놀고, 축구를 하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사람들과 다시 한 번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랐다. 누군가와 얘기가 길어졌는지 아내가 종종거리며 차에 탔다. 늘 배움터에서 만나도 이렇게 시내에서 색다른 곳에서 만나면 할 얘기가 또 생기는 모양이었다. 초등학교 바로 옆 여고를 지나서 골목길을 벗어났다. 사거리 신호등에서 신호를 놓쳤다. 한참을 기다린 것 같았는데 신호가 바뀌지 않았다. 사거리가 크고 넓어서 그가 지켜야 하는 신호등이 멀었고, 다른 차선 신호등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왜 안 가? 아내의 말이 침묵하던 차 안 공기를 깨웠다. 시내를 벗어나 논길에 접어들 때까지 그와 아내는 별다른 말이 없이 앞만 보며 밤길을 달렸다.
나를 만났고, 나를 찾았어, 그럼 그 다음은 어떻게 하지? 좁은 농로 맞은 편에서 상향등을 켜고 빠르게 다가오는 차를 비켜 서느라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를 멈춘 후 던진 그의 말에 아내는 그럼 삶이 편안해지겠지, 했다. 지금 편안하다면? 그렇다면 굳이 찾으려고 애쓰고 애달복달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자 차가 출발했다. 그는 지금 편안한지 자신에게 물었다. 다만, 편안하기 위한 방편으로 묻어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송아지 둠벙 쳐다보기에 불과하니 애써 수면에 파장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지, 선생님 말씀처럼 다 내려놓아서 더 이상 욕구를 하지 않고 담담해진 것인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편안한 삶이라 여겼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삶에 의구심이 생겼다. 라디오가 꺼진 차 안에 침묵이 흘렀고 엔진 소리만 불규칙적인 파장을 그렸다. 길어진 침묵 속에서 기어봉을 잡은 그의 손 위로 아내가 손을 겹쳤다. 농로를 벗어나서 지방도에 올랐고, 지나가는 마을마다 마을 입구에 설치된 과속방지턱에서 가다서다를 반복하느라 차 안은 작은 움직임만 있었다. 그는 기어봉에서 손을 뒤집어 아내의 손을 마주 잡았다. 늦은 시각이어서 오가는 차가 없었고, 속도를 줄였다가 올리느라 애를 쓰는 자동차 엔진 소리만이 봄밤을 울렸다. 그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은 아내의 손을 잡은 채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너머를 말없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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