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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어린사람들

너와 함께 바닷가를 기차는 5분 연착이었다. 잘 오고 있겠지. 조바심은 스스럼없이 일어났다. 언젠가 기차는 아니었지만 내려야 할 터미널을 지나쳐서 시외로 나가기 직전에 내린 적이 있었다. 그때 시외버스를 탔고 잠을 자다가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서 눈을 떠보니 버스는 시 외곽을 벗어나고 있었다. 놀라서 아저씨, 외쳤고 가방을 챙겨서 운전기사에게 뛰어가서 내려달라고 했다. 소심해서 타인에게 말을 잘 붙이지 못했지만 다급한 상황은 이런 성격이 사치란 걸 곧바로 증명해줬다. 운전기사는 짜증스럽게 뭐라고 하면서 길가에 버스를 세웠고 버스 문을 열었다. 버스가 운전기사의 짜증을 발산하듯이 길가에 멍청하게 서 있던 나에게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서둘러 떠났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조금만 더 갔더라면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할 .. 더보기
바닷가에서 자고, 산에 오르자 날이 좋아졌다. 이른 더위가 찾아온 게 맞겠지. 우리는 텐트에서 자도 춥지 않겠는데, 하는 생각을 했고, 곧바로 주말에 우리의 오막살이를 챙겼다. 올해 처음 캠핑은 율포해수욕장 솔밭이었다. 사람들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솔밭에 텐트가 가득해서 텐트 난민촌을 방불케 했다. 요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장박 알박기로 보이는 텐트도 많았다. 올해 첫 캠핑을 다녀오며 우리는, 한적한 데로 가는 게 어떨까, 했고 두번째 캠핑은 유명하지 않은 바닷가로 갔다. 율포해수욕장에서 멀지 않았지만 텐트는 몇 동 보이지 않았고, 우리는 여기가 좋겠네, 하며 우리의 오막살이를 펼쳤다. 부피를 줄이고, 짐을 줄여서 둘이서 한 번에 들고 다닐 수 있으니 한갓지게 펼치고 접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올망졸망한 캠핑 가재도구와 텐트가 .. 더보기
베트남 다낭에서 바다를 보다 그때 바다를 봤다. 도로는 해안선을 따라서 놓여져 있었고, 내내 도로를 달리는 중이었지만 바다를 보지 못 했다. 그때서야 바다를 봤다. 달려 온 거리가 6km라는 이정표를 지나친 후 바다가 눈에 들어왔고, 바다가 있었구나, 알았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파도가 거센 저 바다에서 나왔고, 해안선을 따라 90km 자전거를 탔고, 저 바다를 곁에 두고 달리기를 하는 중이었는데도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를 보지 못 하다니. 그럴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베트남 다낭에서 철인3종대회가 열린다는데 한번 나갑시다, 클럽 사람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흘리듯 던진 말에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했고, 즉석에서 경비 조달을 위한 계좌를 만들었고, 항공권과 호텔을 검색했다. 이게 작년 말이었고, 베트남 다낭 대회는 올해.. 더보기
봄 맞으러 가야지 여수 오동도에 동백꽃은 피었을까, 은하수가 말했다. 이제 겨울은 막바지인지 하루가 다르게 해는 서서히 길어지고, 햇살은 포근하고, 바람은 따스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길목에 동백은 꽃을 피울 텐데, 꽃이 지기 시작하면 가차 없을 텐데. 조바심이었을까. 몇 년 전에 구빈이랑 셋이서 오동도 동백숲을 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동도 동백꽃이 보고 싶었나 보다. 지금쯤 피었을 거 같은데, 갈까? 이번 주말에 일도 없는데, 했다. 주말에는 주중에 해결하지 못 한 일을 처리한다. 대체로 토요일 오전이나 오후 한나절이면 해결되기도 하지만 온종일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래 봐야 한 달에 두어 번이긴 하다. 이런 일이 없을 때나 일요일에는 은하수랑 돌아다닌다. 절집 구경을 하며 숲길을 걷거나, 쇼핑몰에 가서 하릴없.. 더보기
상처와 분노, 고통에서 해방 되는 길 아이, 봐서 머헐 것이냐. 송아지 둠벙 쳐다보기당께. 그때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더라면 뭐가 달라져도 달라졌을까.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니 알 수 없는 일이며, 알 수 없는 일은 알 수 없는 대로 가만히 흘러간다. 다만, 기어코 알아야겠다며 악다구니를 쓰니 상처로 시작해서 분노 속에서 헤매다가 고통에 매여 사는 일이 어디 이것뿐일까. 그가 할머니 말을 되새긴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는 때때로 할머니 음성을 들었지만 한동안 잊고 있었다. 아이, 머시기야. 냅둬불어라. 그것이 송아지 둠벙 쳐다보기당께 자꼬 그랬싼다이. 그럴 때마다 그는 그래, 송아지가 둠벙을 쳐다보며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수면 아래 붕어를 잡을 수 있을까, 우렁이를 건질 수 있을까, 그저 수면에 비친 자기.. 더보기
그가 죽었다 두더지의 부음을 보리밥으로부터 들었을 때 당황스러웠습니다. 살아있는 죽음의 장례식이라니. 부음을 전하면서 보리밥은, 그의 죽음은 대사일번大死一番 절후소생絶後蘇生을 위함이며, 죽음에 따른 장례 절차를 3일에 걸쳐서 치른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대사일번 절후소생이 무엇인가요? 크게 한 번 죽어야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이니 진리의 깨달음, 스승으로부터 깨달음에 이르러 지난날의 자신을 버리고 새롭게 산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니 대사일번은 죽음에 대한 은유일 텐데, 실제로 장례 절차를 진행한다니, 또는 그 3일에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따위에 당황스러웠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보리밥은 부음과 장례 절차를 전하며 나도 어떻게 흘러갈지, 어떤 마음이 생길지 지켜볼 뿐 잘 모르겠다,며 우리는 각자 자신.. 더보기
연극은 끝났다 연극이 끝났습니다. 연극이 끝난 뒤 9학년 친구들은 매듭을 짓고 떠났습니다. 9학년 친구들은 자신의 길을 찾아서 다시 떠나며 새로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 연극은 또 다른 이야기로 무대에 오를 것입니다. 끝난 것은 끝난 것이고, 끝난 것은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추운 겨울날에 매듭을 짓고 길을 떠나는 여리고 작은 아이의 뒷모습을 보는 일은 슬픕니다. 아이가 느끼는 들뜸과 설렘, 걱정과 불안에 더하여 격려와 토닥임이 먼저일 테지만 슬픕니다. 연극이 끝나고 모두가 떠난 뒤 소품이 정리된 텅 빈 무대를 보는 일도 그렇습니다. 끝난 연극을 그대로 다시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매듭을 짓고 떠난 아이에게 매듭을 풀라고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지금은 다만, 다 끝난 일은 다 끝난 일이니, .. 더보기
추석맞이 콩쿨대회 추석맞이 콩쿨대회 1. 월곡마을은 전라남도 순천시 남산 남서쪽 자락에 쏙 들어앉아 있다. 마을 앞으로 이사천이 흐르고, 이사천은 순천만을 통해 먼바다로 간다. 마을 삼분의이 지점에 회관이 있고, 회관 뒤로 난 길이 마을을 둘로 나눈다. 길 위로 남산 쪽은 안침이고, 아래는 바깥침이다. 아이들은 안침, 바깥침으로 편을 나눠 축구를 하고, 야구를 하고, 자치기를 하고, 오징어깐세, 삼팔선깐세를 한다. 안침은 가구 수가 바깥침보다 적어서 아이들 수도 적지만, 열 번 하면 일곱이나 여덟은 이긴다. 고등학교 이학년이 주축이 된 학생회의 회장도 주로 안침 출신이 맡는다. 학생회에서 한 달에 한 번, 일요일 아침에 마을 대청소를 한다. 학생회는 안침, 바깥침이 따로 없다. 마을 대청소를 하는 날에는 국민학생도 빗자루.. 더보기